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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 오가는 길, 실크로드 - (4)서울.경기
고대 동.서양 교류의 증거 '빗살무늬토기'
북유럽 핀란드.시베리아 거쳐
몽골초원.요하.한반도서 출토
황성신문 기자 / 입력 : 2014년 04월 29일(화)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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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유역은 민족문화의 서장을 연 신석기 시대에 대동강 유역과 더불어 빗살무늬토 |  | | | ↑↑ 풍납토성 유물 | ⓒ 황성신문 | | 기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이다.
중서부지역의 빗살무늬토기는 새로운 주민의 이주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빗살무늬토기의 발원지는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 분포지는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한 북위 55도 이북 지역에 하나의 문화대를 형성하고 있다.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는 서단은 북유럽의 핀란드다.
이 토기는 중부 시베리아를 거쳐 몽골초원과 요하 유역에서도 출토되며,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는 동단은 한반도가 된다.
한강 유역에서 출토되는 빗살무늬토기 중 대표적인 것은 서울 암사동 출토 빗살무늬토기이다.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와 더불어 한강 하류 지역인 강화도에서 확인되는 청동기시대 고인돌은 한강 유역이 문명교류의 중요 거점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
한반도의 젖줄인 한강을 끼고 있는 서울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 까지는 백제의 수도였다.
한강 하류지역에 자리 잡은 서울은 2000년 전부터 일국의 수도 역할을 했던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백제는 건국 초기 대동강 유역에 자리 잡은 낙랑과 때때로 대립하기도 하고, 교류의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낙랑이 고구려에 의해 축출된 후 4세기 후반부터는 남하하는 고구려와 한강 유역의 백제는 치열한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됐다.
백제는 북방계인 부여족이 남하해 건국한 나라였으나 4세기 후반부터 고구려와의 대립관계가 지속되자 해로를 통한 남방과의 교류에 치중했다.
4세기 이후 신라에서 동시기의 백제보다 월등히 많은 서역문물이 확인되는 이유는,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대립하고 있었던 정치적 역학 관계가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475년 한강 유역을 점령한 고구려는 6세기 중반까지 교통로를 따라 한강 북부에 고구려 보루를 축조했다. 6세기 중반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장악한 이후, 이 지역은 최종적으로 신라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됐다. <자료출처=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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