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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과 신하 김후직
황성신문 기자 / 입력 : 2014년 07월 07일(월)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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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황성신문 | 신라 천년의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왕을 지낸 사람이 26대 진평왕(眞平王)이다. 진평왕은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창피하게도 아버지는 여자 문제로 죽었다. 아버지 동륜(銅輪)은 무척이나 여자를 탐했다. 동륜의 죽음을 전하는 기록은 ‘삼국사기’와 ‘화랑세기’에 나란하다.
‘삼국사기’에는 진흥왕 33년(572), ‘3월에 왕태자 동륜이 죽었다’라고 간단히 적은데 비해 ‘화랑세기’는 세세한 과정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동륜이 보명궁의 담을 넘다 큰 개에게 물려 죽었다는 것이다. 보명은 아버지인 진흥왕의 후궁이었다.
이렇게 동륜이 불명예스럽게 죽자 동생 금륜에게 왕권이 넘어갔는데, 그 역시 너무 색을 탐하다가 쫓겨나고 그 뒤를 이어 동륜의 아들인 진평왕이 열세 살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이후 진평왕은 무려 53년간 왕위를 지키며 신라 전성기를 이끌었다.
진평왕은 어찌나 힘이 세고 거구였는지 키가 11척이었으니 요즘으로 따지면 2m가 넘었다.
한번은 왕이 제석궁(帝釋宮)을 오르는데 돌계단 두 개가 깨져 버렸다. 왕은 주변의 신하들에게 “이 돌들을 움직이지 말고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라”고 하며 힘을 과시했다.
왕은 사냥을 몹시 즐겼다. 틈만 나면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 사냥에 나섰다는 것이다. 이런 왕에게 조정에서 병부령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는 김후직(金后稷)이 간언했다. “예로부터 임금은 하루에도 1만 가지 정사를 보살피느라 부지런했으며, 주위에 바른 선비를 두고 그들의 직언을 받아들여 멋대로 즐기거나 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께서는 날마다 사냥꾼을 데리고 매와 사냥개를 놓아 꿩과 토끼를 잡기 위해 산과 들로 뛰어다니는 것을 스스로 멈추지 못하고 계십니다. 노자(老子)는 ‘말달리며 사냥하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고 했고, 서경(書經)에는 ‘안으로 여색에 빠지거나 밖으로 사냥에 탐닉하는 일, 이 중에 하나만 있어도 망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로 보면 사냥이란 안으로 마음을 방탕하게 하고 밖으로 나라를 망치는 것이니 대왕께서는 유념하소서”
그러나 왕은 듣지 않았다.
그 후 김후직이 병들어 죽음을 앞두게 되었을 때 세 아들을 불러 말했다. “내가 신하된 자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다. 대왕께서 놀고 즐기는 일을 그치지 않으니, 이로 인해 나라가 위태로워질까 두렵다. 죽어서라도 꼭 깨우쳐드리려 하니 나의 뼈를 대왕이 사냥 다니는 길옆에 묻어라”는 말을 남겼다.
아들들이 아버지의 유언을 따랐다.
어느 날 왕이 사냥을 가다가 도중에 어렴풋이 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마치 “가지 마소서!…”라고 하는 것 같았다.
왕이 돌아보며 “이 소리가 대체 어디서 나는 것이냐”고 물었다. 말고삐를 쥐고 있던 종자가 “저것은 김후직의 무덤인데 그곳에서 나는 소리 같습니다”라며 김후직이 죽을 때 한 말을 그대로 아뢰었다.
진평왕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 사람은 생전에 충성으로 간언하고 죽어서도 그치지 않으니 나를 아끼는 마음이 이렇게 깊구나. 끝내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살아서나 죽어서나 무슨 낯으로 그를 대하겠는가”
왕은 그 이후로 사냥에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죽은 뒤 무덤 속에서까지 왕에게 했던 그의 충간을 사람들은 ‘묘간(墓諫)’이라 부르며 칭송했다. 경주역에서 포항으로 가는 국도 옆에 그의 묘로 알려진 분묘가 있다.
어떤 조직이든 이렇게 충심으로 간하는 사람이 있다면 모든 것이 바르게 갈 것이다. 국가든 기업이든.
<이종훈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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