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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두’는 삼국 사기에 따르면 신라 귀족가문의 자손이 었다.
일 찍 이 친 구 네 사람과 함께 모여 술을 마시면서 각자 의 뜻을 말하였는데 설계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신라에서 사람을 등용하는데 골품(骨品)을 따 지기 때문에 진실로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어도 그 한계를 넘을 수가 없다. 나는 원컨대 중국으로 가서 세상에 보기 드문 지략을 드날려 특별히 공을 세워 스스로의 힘으로 영광스러운 관직에 올라 의관을 차려입 고 칼을 차고서 천자의 측근에 출입하며 만족하 겠다.’
무덕(武德: 당나라 고종의 연호 618~626) 4년 에 설계두는 몰래 바다를 통해 당나라에 들어갔 다. 그때 마침 태종 문황제(文皇帝)가 고구려와 의 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고구려를 정벌할 때 설 계두는 스스로 군인이 되어 참전하게 되었다.
황제의 군대가 요동에 이르러 고구려와 싸울 때 고구려 진영 깊숙이 들어가 민첩하게 싸우다 가 죽으니 그 공이 일등이었다.
황제가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나라 사람도 오 히려 죽음을 두려워하여 좌우를 살피느라 앞으 로 나가지 못하였는데 외국인으로서 우리를 위 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어떻게 그 공을 갚을까 하 고 설계두의 시종에게 물었다.
시종은 그의 평생소원을 황제에게 말하였고, 이를 들은 황제는 자신의 옷을 벗어 시신을 덮고 설계두에게 대장군의 관직을 주고 예로서 장례 를 지내주었다.
신라사회는 신분으로써 철저하게 통제하였던 골품제도하에서 설계두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위험을 무릎 쓰고 외국으로 나아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천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우리사회는 역시 눈 에 보이지 않는 신분의 차이를 비롯한 빈부격차, 사회적 편견 등으로 얼룩져 있다.
이로 인하여 모국을 등지고 타국으로 떠나는 우수한 연구인력과 세계적인 스케이트선수 안 현수와 유도선수 추성훈씨와 같이 많은 분야의 인재들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국을 등지 고 타국의 국민으로 살아가고 있어 우리들을 안 타깝게 하고 있다.
신라가 폐쇄적인 골품제도로 인해 설계두와 같은 훌륭한 인재를 잃었던 과오를 범했다면 지 금의 우리는 과연 편견 없이 인재를 발탁하고 있 는 것일까?.
또한 편견 없이 외국인들을 귀화시켜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서 마음껏 뜻을 펼칠 수 있는 미래의 한국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우리는 노력 하고 있는지 물음을 던져본다.
다문화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 역시, 수 천 년을 동일한 문화 속에서 생활해 온 우리민족에 게 타국, 타문화를 단숨에 받아들이기란 그리 쉬 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우리의 풍습이 익숙하듯이 다문화가족들에게는 그들의 문화에 익숙한 것 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그들의 문화와 풍속을 이해하고 꾸준 한 지원과 배려를 한다면 그들도 우리의 문화 를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보다 더 우선해야 할 것은 모든 인간은 평등한 인격체로서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국가와 민족, 인종과 종교, 학벌과 지 역 등으로부터 편견이 없는 사회로 나아간다면 설계두 처럼 한국으로 귀화한 사람들의 우수한 역량으로 한국사회는 더 풍요로운 문화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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