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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년 왕궁의 신비 베일 벗다’ 경주 월성 내부발굴 최초 공개
길이 28m 이르는 대형 건물터 등 통일신라 유물·유적 대거 출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첫 시굴조사 성과 발표
장성재 기자 / jsjaeya@gmail.com 입력 : 2015년 03월 23일(월)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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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황성신문 | | 신라의 국보였던 전설의 피리 ‘만파식적(萬波息笛)’이 보관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진 ‘경주 월성’의 첫 시굴조사 성과가 공개됐다. 특히 이번 시굴 조사 과정에서 신라 시대 대규모 건물터와 다량의 유물이 발굴되면서 월성 왕궁의 신비로움에 대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경주 월성 조사는 천년 고도 경주의 역사정체성을 규명하고, 대통령 공약사항인 ‘경주 역사문화 창조도시 조성(왕궁 복원)’의 이행을 뒷받침한다는 두 가지 배경이 있다. 더불어 지난 1914년 일제가 남벽 부근을 처음 파헤친 지 100년 만에 우리 손으로 실시한 최초의 내부조사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지난 18일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심영섭)는 지난해 12월 12일 고유제를 기점으로 약 50여 일 동안 조사·진행한 사적 제16호 경주 월성 중앙지역(5만 7천㎡)의 시굴 성과를 언론에 공개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현재까지 확인된 대형 건물지와 담장의 흔적들은 유적 내 최상층에 위치하고 있으며, 삼국 시대에서 통일신라 시대 전반에 걸친 토기와 기와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볼 때 통일신라 시대 월성의 마지막 단계의 모습일 가능성이 높다. 조사지역에서는 기단, 초석, 적심 등 건물지 6동과 담장 12기 등이 확인됐으며, 이 가운데 정면 12칸, 측면 2칸의 3호 건물지(28m×7.1m)는 적심 위에 초석을 올렸고 담장과 배수로가 딸려있다. 대량으로 발굴된 유물은 고배, 병, 등잔, 벼루, 막새기와, 귀면기와, 치미 등 통일신라 시대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었다. 토기에는 ‘井’, ‘口’자 형태의 음각기호가 새겨진 것도 있고, 월성의 해자와 안압지에서 이미 발견된 적이 있는 ‘儀鳳四年 皆土(의봉4년(679년) 개토)’, ‘習部(습부)’, ‘漢(한)’자명의 평기와도 있다. 경주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이번 시굴조사는 지하 매장구조의 전반적인 양상을 파악하고자 실시했으며 조사품질 향상을 위해 서울 풍납토성과 경복궁, 익산 왕궁리유적, 강릉 굴산사지 등 주요 국가사적을 조사한 인력이 대거 투입됐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번 성과를 토대로 월성 정밀발굴조사의 전환을 문화재위원회에 부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월성은 지형이 초승달과 같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서기 101년 파사왕(婆娑王)이 처음 쌓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신라가 멸망한 10세기까지 800여 년 동안 왕궁이 위치했던 장소이며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국보였던 전설의 피리 만파식적이 보관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만큼, 오래전부터 국가의 중요시설로 알려져 있다. 만파식적은 신라 신문왕이 682년에 만들도록 한 신라의 국보. 나라에 근심이 생길 때 불면 평온해진다는 전설의 대나무 피리로, 경주 월성 안의 천존고(天尊庫)에 보관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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