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황성신문 |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김양은 태종무 열왕 김춘추의 9세손일 뿐 아니라 그 가문 또한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장수와 재상을 지낸 명 문가였다. 그는 태어나 면서부터 영특하고 걸 출하였으며, 관직에 나 아가, 가는 곳마다 정무(政務)를 잘 다스려 명성 이 있었다.
흥덕왕(興德王: 826~836)이 돌아가자 적자(嫡子)가 없어 왕의 4촌 동생 균정(均貞)과 또 다른 4촌 동생의 아들 제륭(悌隆)이 왕위를 다투었는 데 김양은 균정의 아들인 우징과 매제인 예징과 함께 균정을 왕으로 삼고, 궁궐에 들어가 사병들 과 궁궐을 방어하였다. 그러나 제륭의 무리 김명 (민애왕)과 이홍 등이 와서 포위하자 김양이 군 사를 궁문에 배치하여 막으면서 ‘새 임금이 여기 에 있는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흉악한 반역을 할 수 있느냐.’ 하고 드디어 활을 당겨 10여 사람을 쏘아 죽였다.
상대방 제륭의 부하 배훤백이 활을 쏘아 김양 의 다리를 맞혔다. 이에 균정이 말하기를 ‘저 편 은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형세를 막아 낼 수 가 없다. 공은 짐짓 패한 척 물러가 뒷일을 계획 하라.’ 이에 김양이 포위망을 뚫고 나가 한지의 시장에 이르렀을 때 균정은 반란군들에게 죽었 다. 김양은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고 밝은 해를 가리켜 맹세하며, 아무도 모르게 산야에 숨어 때 가 오기를 기다렸다.
|  | | ↑↑ 김양묘와 김인문묘 경주 서악동 태종무열왕릉 남쪽 김인문묘(추정 김유신 장군묘)와 나란하게 위
치해 있는 왼쪽의 고분이 경상북도 기념물 제33호 김양(金陽)묘이다. [삼국사기]에 ‘김양이 향년 50세에
자기 집에서 죽으니, 문성왕이 애통해하며 관직을 높여주고 부의와 장례를 모두 김유신 장군의 장례 때
처럼 시행하게 하여 태종무열왕릉에 배장 하였다.’ 한다. 김양의 묘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원형봉
토분이지만 신라의 많은 고분 중 무덤의 주인공 이름을 알 수 있는 몇 안되는 고분 중의 하나이다. | ⓒ 황성신문 | |
균정의 아들 우징(신무왕)이 남은 군사를 거두 어 청해진으로 들어가 장보고와 결탁하여 거사 를 모의 한다는 것을 듣고 합류하여 4년 만에 민 애왕(김명)을 죽이고 거사를 성공하였다. 이에 김양은 좌우 장군들에게 명하여 기병을 거느리 고 돌면서 말하기를 ‘본래 원수를 갚으려한 것이 므로 지금 그 우두머리가 죽었으니 귀족 남녀와 백성들은 마땅히 각각 편안히 거쳐하여 망동하 지 말라.’ 하고 왕성을 수복하니 백성들이 안심 하였다.
다시 김양은 예전에 활을 쏘아 자신을 맞혔던 장군 배훤백을 불러 말하기를 ‘개는 제각기 주인 아닌 사람에게 짖는다. 네가 그 주인을 위하여 나를 쏘았으니 너는 의로운 군인이다. 내가 따 지지 않겠으니, 너는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하며 더 이상 문책하지 않았다.
이 말을 듣고 ‘배훤백을 저렇게 처리하니, 다 른 사람들이야 무엇을 근심하리요’ 라고 말하며 감동하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김양이 배훤백을 문책하지 않는 모습, 자신의 본분을 다한 것에 대해 적이라 할지라도 흔쾌하 게 받아들이는 그런 모습들은 고대인들이 얼마 나 신의(信義)를 귀중하게 생각하였으며 적에게 너그러웠는지를 알 수 있다. 오늘의 동지가 내일 의 적이 되고 눈앞의 이익을 위해 너무도 쉽게 신의를 버리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