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김후직의 간묘 전경 경주시 황성동 471번지 계림중학교 북쪽에 위치한 신라충신 김후직의 무덤
이다. 이 무덤에는 조선 숙종 36년(1710) 경주부윤이었던 남지훈이 김후직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표석이 남아 있다. | ⓒ 황성신문 | |
삼국사기’에 김후직 은 지증왕의 증손자로, 진평대왕을 섬겨 이찬 이 되고 병부령에 임명 되었다. 대왕이 자못 사 냥을 좋아함으로 김후 직이 사냥을 그만둘 것 을 아래와 같이 간청하 였다.
옛날의 임금은 반드시 하루에도 만 가지 정사 를 보살피되 깊고 멀리 생각하고, 좌우에 있는 바른 선비들의 직언을 받아 드리면서, 부지런하 여 감히 편안하게 놀기를 즐기지 않았습니다. 그 런 후에야 덕스러운 정치가 깨끗하고 아름다워 져 국가를 보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님께서는 날마다 미친 사냥꾼과 더불어 매 와 개를 풀어 꿩과 토끼들을 쫓아 산과 들을 달 리어 스스로 그치시지 못합니다.
노자(老子)는 ‘말 달리며 사냥하는 것은 사람 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 하였고, 서경(書經)에는 ‘안으로 여색에 빠지고 밖으로 사냥을 일삼으면, 그 중에 하나가 있어도 망하게 된다.’ 고 하여 사 냥을 그만둘 것을 간청하였다.
왕이 따르지 않아 또 간절히 간청하였으나 받 아들여지지 아니하였다. 후에 김후직이 병들어 죽을 즈음, 세 아들에게 내가 비록 죽더라도 반 드시 왕을 깨우쳐 주려 생각하니 모름지기 내 뼈 를 대왕이 사냥 다니는 길가에 묻으라고 유언하 였다. 후일에 왕이 사냥길에 올라 반쯤 갔을 때 먼데서 소리가 나는데 ‘가지 마시오. 가지 마시 오’ 하는 것 같았다.
왕이 돌아보며 소리가 어디에서 나는가 물었 더니 그때 비로소 김후직의 이 같은 충심을 들어 알게 되었다.
대왕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하기를 그대의 충성스러운 간(諫)함은 죽은 후에도 남아있으니, 나를 사랑함이 깊도다. 만일 내가 이를 끝내 고 치지 아니하면 살아서나 죽어서나 무슨 낯을 들 겠는가 하고, 마침내 종신토록 다시는 사냥을 하 지 않았다 한다.
이후 김후직이 진평왕에게 간(諫)한 내용은 후 대인들에 의해서 신하된 도리로써 충언의 표본 으로 여겨졌다. 또한 죽은 뒤 무덤 속에서까지 왕에게 했던 그의 충언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그 의 무덤을 간묘(諫墓)라 불렀다.
오늘날 이 이야기를 되새겨보면 김후직은 어 리숙하고 고집스러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죽은 후 까지도 자신이 모신 왕에 대한 충성심을 보인 그나 그 충정을 나중에라도 깨닫 고 행동에 옮긴 왕을 생각하면 소문도 무성하고 말도 많은 세상, 상사에게 충언보다 좋은 말만하 는 아랫사람이나,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윗사람 일지도 모르는 우리들의 모습을 한번쯤은 되돌 아보게한다.  |  | | ⓒ 황성신문 |
사)신라문화진흥원 부이사장 김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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