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산 195(오봉산 주사암‘모죽지랑가’의 배경이 된 부산성의 지맥석 드라마 ‘선덕
여왕’과 ‘동이’의 촬영지 이기도하다 | ⓒ 황성신문 | |
『삼국유사』에 득오가 화랑 죽지랑(竹旨郞) 을 그리워해 지었다는 ‘모죽지랑가’는 신라 효소 왕대의 일이다. 화랑의 무리 중에 득오급간(得烏級干)이 풍류황권(風流黃卷-화랑들의 명부로 추 정)에 이름을 달아놓고 날마다 출근을 하다가 열 흘이 되도록 보이지 않았다. 죽지랑이 득오의 어 머니를 불러 그 연유를 물으니 모량에 위치하고 있는 부산성(富山城)의 창고지기로 임명되어 그 곳으로 서둘러 갔기 때문에 연락하지 못하였다 고 대답하였다.
죽지랑이 말하기를 “그대 아들이 만약에 사 사ㅍ로운 볼일로 갔다면 구태여 찾아볼 것도 없 겠지만 이제 들으니 공무로 갔다 하니 찾아보고 음식 대접이라도 해야되겠다” 하고는 곧 떡 한 그릇과 술 한 항아리를 가지고 하인을 데리고 가 는데 화랑 137인이 역시 위의를 갖추고 따랐다. 부산성에서 득오를 위문하고 휴가를 얻어 함께 돌아 오려하였다. 그러나 부대장인 익선아간(益宣阿干)이 휴가를 승낙하지 않아 실랑이가 벌어 졌다. 때마침 이 모습을 지켜보던 추화군의 관리 간진(侃珍)과 진절(珍節)이 죽지랑이 부하를 소 중히 생각하는 마음을 찬미하는 한편 익선의 벽 창호 같은 태도를 비루하게 여겨 가졌던 벼 30석 을 익선에게 주면서 청을 들어주라고 권하였으 나 그래도 승낙하지 않더니 또다시 진절의 말안 장까지를 뇌물로 주고서야 승낙 받을 수 있었다.
조정의 화주(花主-화랑의 통솔자)가 이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익선을 잡아다가 그 더럽고 추 한 것을 씻어주려고 하였으나 익선아간이 도망 하여 숨어버렸기 때문에 그의 큰 아들을 붙들어 갔다. 그때가 동짓달 매우 추운날이라 성(城)안 못 가운데서 탐욕스러움을 씻어주기 위하여 목 욕을 시켰더니 곧 얼어 죽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모량리 사람으로 벼슬하는 사람들은 모두 내쫒아서 다시는 관청에 발을 못 붙이게 하고 중이 되지 못하게 하며, 이미 중이 된 자라도 큰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또 간진의 자손을 올려 평정호(枰定戶)로 삼아 이를 표창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 동방에서도 도덕이 고명하기로 소문난 원측법사(圓測法師)가 모량 리 사람이라는 이유로 중의 벼슬을 얻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모죽지랑가(慕竹旨郞哥)라는 향 가의 배경으로 득오가 죽지랑을 그리워하여 지 은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군역의 의무를 이행하 는 것은 우리나라의 지리적 입지나 정치적 상황 을 통해 보더라도 매우 중요한 의무이다. 특히 앞의 이야기를 보더라도 고대사회에서의 군역비 리는 광범위하게 연좌제로 처벌 받고 있다.
그러나 정치인이나 유명연예인들을 비롯해 사 회적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 각종비리와 연루 되고 있는 근간의 모습들을 지켜보노라면 기본 적으로 국민이 지켜야 할 세금납부와 병역의무 는 힘없는 서민들이나 지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어쩌면 지금의 사회가 고대사회보다 더 철저 한 도덕적 연좌제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문화유산 둘러보기 : (사)신라문화진흥원 부이사장 김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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