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인지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 왕 위를 물려주기를 간 절히 원했다.
‘삼국유사’에 경덕왕이 아들을 얻지 못하자 왕 비를 폐하여 사량부인(沙梁夫人)으로 삼고, 새로 이 만월부인(滿月夫人)을 왕비로 맞았다. 그러나 경덕왕은 만월부인에게도 자식을 얻지 못하였다.
왕이 하루는 표훈스님에게 말하기를, ‘내가 복 이 없어 자식을 얻지 못하니 원컨대 스님은 하느 님[天帝]께 부탁하여 아들을 얻을 수 있게 하라.’ 하였더니 표훈이 하늘로 올라가 하느님께 요청 하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하느님의 말씀이 딸이 면 곧 될 수 있으나 아들은 안 된다고 합니다.’ 라 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딸을 아들로 바꾸어 주기 바란다.’고 하니 표훈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 부탁하였다. 하느님이 말하기를, ‘그렇게 될 수는 있으나 그러나 아들을 낳으면 나라가 위태로워 질 것이다.’ 하였다.
표훈이 내려와서 하느님이 하는 말로써 이르 니 왕이 말하기를, ‘비록 나라가 위태롭더라도 아 들을 얻어 뒤를 이었으면 그만이겠다.’ 하였다. 이후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으니 왕이 매우 기뻐 하였다. 그가 바로 혜공왕이다.
‘삼국유사’는 이 설화에 대해 경덕왕이 하늘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억지로 아들을 얻었기 때 문에 혜공왕이 즉위한 뒤에는 여러 차례의 반란 이 일어났다고 기록하였다.
그 첫 번째가 재위 4년에 대공과 대렴이 반란 을 일으켜 33일간 왕궁을 에워 쌓고, 재위 6년에 는 대아찬 김융이 반란을 일으켰다.
재위 11년에는 이찬 김은거가 반란을 일으켰 고, 같은 해 가을 8월에 이찬 염상이 시중 정문과 함께 반역을 꾀하였다. 즉위한 뒤에 이처럼 큰 난리가 몇 차례나 있었고, 혜공왕의 마지막 재위 16년에 대해서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 있다.
‘왕은 어려서 왕위에 올랐는데, 장성하자 음악 과 여자에 빠져 나돌아 다니며 노는데 절도가 없 고 기강이 문란해 졌다. 그리고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고 인심이 등을 돌려 나라가 불안하였다. 이에 이찬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켜 무리를 모아 서 궁궐을 에워싸고 침범하였다. 여름 4월에 상 대등 김양상이 이찬 경신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김지정 등을 죽였으나, 이때 왕과 왕비는 반란군 에게 살해되었다.’
경덕왕 재위 당시에는 신라사회가 정치적, 경 제적으로 안정되었던 때로, 불국사와 석굴암 등 신라문화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대였음에도 불 구하고 삼국통일 이후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강 력한 국왕의 권력이 행사되던 때가 지나고 귀족 세력의 발언권이 점차 강해지던 무렵이었다.
이러한 시절이었기에 경덕왕은 국왕의 권위 와 전통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이러한 무리수를 두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 중의 하나가 757년 전국의 군현명칭을 한자식(漢字式)으로 바꾼 일 이라던가, 759년 중앙관청의 명칭을 한자식으로 바꾼 것 등으로 중국식 정치제도를 활용하여 정 치운영에서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한 시도 를 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이 어린 혜공왕이 즉위한 뒤에는 이전의 지명과 관청 명칭 등이 모 두 원래대로 돌아옴으로써 경덕왕의 노력은 헛 수고로 끝나고 말았다.
현대사회에서도 재벌들은 자식에 의한 부의 세습을 위해 편법을 사용하고, 권력자는 의리와 규칙을 버리면서까지 자신을 추종하는 후계자를 세우려 한다.
경덕왕의 무리한 욕심이 아들 혜공왕의 불행 으로 이어진 것처럼 재벌과 권력자 그리고 기득 권을 끝없이 이어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과 모 든 집단들은 역사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무리한 욕심은 정의보다는 불의를, 행복 보다는 불행을 넘겨준다는 것을 알았으면 해 본다. <문화유산 둘러보기 : (사)신라문화진흥원 부이사장 김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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