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기림사 매월당 영당(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매월당 김시습의 영정은 원래 은거하였던 경주남산
의 용장사에 사당을 지어 모셨으나, 고종 5년(1868)에 훼철되었다. 이를 애석하게 여긴 경주유림들이 경
주부윤 윤창식에게 청원하여 기림사 경내에 다시 지었으나 퇴락되어 1998년 경주시에서 현 위치에 다시
재건하였다. 현재의 영정은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에 있는 보물 제1497호인 작가 미상의 김시습
영정이 모셔져 있고, 사당의 주련에 ‘사청사우’가 써져 있다. | ⓒ 황성신문 | |
매월당 김시습은 세종 17년(1435) 서 울 명륜동에서 태어 나 8개월 만에 글을 쓰고 읽었으며, 세종 임금 앞에서 ‘삼각 산’이란 시를 지어 왕에게 비단 50필을 받은 장래가 촉망되 는 신동이었다. 그러 나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를 하던 중 세조가 왕 위를 찬탈하자 하던 공부를 그만두고 절개를 지 키기 위하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9년간 전 국을 방랑하였다.
그런 생육신인 김시습도 세상을 자신 혼자만 으로 살수가 없다는 것을 잠시 느낀 시절이 있 었다. 세조 9년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권유로 세조가 한문으로 된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는 언 해사업을 도왔으며, 효령대군의 청으로 원각사 의 낙성회에도 참석하였다. 그러나 잠시 머물렀 을 뿐 김시습은 서울을 등지고 경주 남산의 용장 사에 거주하면서 경주남산의 또 다른 이름인 ‘금 오산’의 이름을 딴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저술하였다.
그 후 성종 2년(1471) 경주를 떠나 서울로 올 라가 수락산 등지에서 승려로 10여년을 살다가 안씨 성을 가진 여인과 재혼하는 등 일시적으로 환속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전국을 떠돌며 다 시 방랑의 길을 가게 된다.
김시습의 생애를 보면 임금에게 총애 받던 어 린 시절이 있기도 하였지만 15세에 어머니의 죽 음을 맞이하여 강릉에서 3년간 오두막을 짓고 어 머니의 무덤을 지키기도 하였다. 이후 아버지의 재혼으로 외가에 맡겨졌지만, 곧이어 그를 돌보아 주던 외숙모마저 죽었다. 이즈음 훈련원 도정 남 효례의 딸을 아내로 맞았지만 아버지마저 중병에 걸리는 등 가정적으로 고통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결혼생활 또한 순탄하지 못한 일생을 살았다.
김시습은 불운한 생애를 살았지만 그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격식 없는 자유로운 시와 글을 썼 던 문인으로, 불교의 철학과 유교의 이상을 결합 하려고 고심했던 철학자로, 몸과 생명을 중시하 는 수련도교를 실천하는 사상가로, 백성들의 고 단한 삶을 동정했던 인도주의자로, 우리국토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 깃들여 있는 전통미를 찬미 하였던 여행가로 기억하고 있다.
또한 시대와 불화했던 지식인이었으나 고결한 인품과 굳센 지조는 후세에 길이 존경받았다. 선 조임금은 율곡 이이에게 그의 전기를 짓도록 하 여 ‘매월당집’을 발간하였고 정조임금은 시호를 청간(淸簡)으로 하여 그 풍모를 기릴 만큼 절개 를 지킨 선비였다.
그가 남긴 수많은 시가 있지만 그중 대표적인 시(詩) 중의 하나가 세상인심의 변덕스러움을 날 씨에 비교하여 읊은 사청사우(乍晴乍雨)이다. 이 시는 기림사의 매월당 영당의 건물 왼쪽기둥에 서부터 오른쪽기둥 순으로 주련에 새겨져있다.
乍晴還雨雨還晴 天道猶然況世情
譽我便是還毁我 逃名却自爲求名
花門花謝春何管 雲去雲來山不爭
寄語世人須記認 取歡無處得平生
언뜻 개었다가 다시 비가 오고, 비 오다가 다 시 개이니, 하늘의 이치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세 상인심이야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 나를 기리 다가도 문득 돌이켜 나를 헐뜯고, 공명을 피하더 니 또 도리어 스스로 공명을 구하기도 한다. / 꽃 이 피고 지는 것을봄이 어찌 다스리겠는가, 구름 은 늘 오고가지만 산은 구름을 잡으려 다투지 않 는다. /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노니반드시 기억해 알아두라, 기쁨을 취하려 한들 어디에서 평생 즐 거움을 얻을 것인가를...
요즘 김시습의 ‘사청사우’가 나를 돌아보게 한다. 김시습은 세상의 어려움을 어떻게 견디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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