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봉화 태백산사고지 전경(사적 제348호, 문화재청 홈페이지) 조선왕조는 오대산, 마니산, 적상 산, 춘추관, 태백산에 각각 사고를 지어 실록을 보관하였다. 태백산사고터는 경상감사 류영순이 추천하 여 선조 39년(1606)에 짓고 1913년까지 실록을 보관하였던 곳이다. 이곳에서 보관되었던 실록은 일제시 대 조선총독부에 의해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졌고, 광복 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그대로 소장되었다가 이관되어 현재 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건물은 해방 전후에 불타 없어지고 산사태 등 으로 매몰되었던 것을 1988년 발굴하였다. | ⓒ 황성신문 | |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의 불행한 죽음이 없었다면 비 범하기 까지는 못해 도 평범한 군주는 되 었을지 모른다. 그 가 즉위 초에 전국의 모든 도(道)에 어사 를 파견하여 지방관 들의 기강을 바로세 우고 백성들의 고초를 살핀 일이 이를 말해준다. 하지만 그에게 현군(賢君)의 자질이 부족함은 무 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기 전 4년 재위기간 내내 사림파와 긴장관계를 조성한 것에서 짐작 할 수 있다.
재위초반은 겉으로는 성종이 다져놓은 유교정 치체제, 평화로운 문치주의가 계속된 시기처럼 보인지만 사림파와 훈구파가 치열한 암투를 벌 이고 있었고, 이 두 세력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연산군에게 주어진 최대의 정치과 제였다. 사림파가 훈구파를 공격하는 이유에는 부정부패로 얼룩진 훈구파를 제거대상으로 본 까닭도 있었지만 이들의 직책이 간쟁을 임무로 하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삼사(三司) 소속 인 까닭도 있었다.
특히, 통틀어 다섯명 밖에 안되는 사관원 언관 (言官)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이들 에게는 공무중은 물론 금주령기간에도 구애받지 않고 공공연히 술을 먹어도 되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그 이유는 [필원잡기]에 따르면 이들은 왕의 잘못을 들춰내어 바로잡는 어려운 일을 맡 고 있었으므로 평소에도 이렇게 기개를 꺾지 말 고 키워두어야 자신의 직위와 생명을 걸고 왕에 게 직언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론기관의 주요한 임무는 예나 지금이나 올 바른 정보를 취재하고 공정하게 보도하는 것이 다. 사림파가 장악한 삼사는 현재의 언론보다 훨 씬 강경했다. 이들은 부정한 현실과 타협하기를 거부하는 성리학을 신봉하는 사상가들이었기 때 문이다. 그런데 연산군이 사림파에 호의적이지 않음을 확인한 훈구파는 사림파를 쓸어버릴 기 회를 노리고 무오사화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발단의 계기는 [성종실록]을 펴내기 위한 사 국(史局)을 열면서부터였다. 사화의 당사자인 김 일손은 기사관(記事官)이었으며 이극돈은 실록 청 당상관이었다. 이극돈은 김일손에게 자신이 세조 때 불경을 외웠다는 것과 전라도관찰사 재 임시 국상(國喪)이 있었음에도 장흥 관기들을 불 러 주연을 베푼 것을 실록에 기록되지 않도록 부 탁하였다. 그러나 김일손은 이를 거절하였고, 이 에 이극돈은 실록청 당상인 윤효순과 짜고 이 사 초의 담당관인 성중엄에게 김일손의 사초를 [성 종실록]에 싣지 말도록 압력을 가했다. 자신에게 불리한 보도를 막기 위해 언론사 간부나 편집 데 스크에 압력을 넣는 오늘날 일부 정치가와 관료, 또는 재벌들의 행태와 마찬가지의 언론 탄압이 었다.
실록청 당상들이 담당관에게 압력을 넣은 사 실을 알게 된 사림파 이목 역시 실록 편찬에 참 여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담당관인 성중엄에게 ‘만약 김일손의 사초가 실리지 않으면 실리지 않 은 그 사실 자체를 실록에 기록하겠다.’ 라고 하 였다. 이에 훈구파에서는 이극돈 개인의 문제만 이 아니라 판단하고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문제 삼으면서 사림파의 입 자 체를 싫어하는 연산군에 의해 사화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펜은 문화의 시기에는 강력한 존재이지만 칼이 힘을 갖는 무력의 시기에는 덧 없이 무력한 존재에 불과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어느시대의 권력자이든 민중들의 뜻을 전달하는 언론이 입에 맞지 않는다고 입맛에 맞 는 언론만을 호식(好食)만 한다면 그게 임금이든 누구든 세끼 밥을 축내는 삼식(三食)이 밖에 더 되겠는가?
연산군은 삼사를 포함한 신하 전체를 길들이 려는 시도는 중종반정으로 인하여 처참한 실패 로 끝을 맺는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다산(茶山)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1집의 탕론(湯論)에서 말한 것처럼 백성들에게는 ‘부당한 군주를 백성의 힘으로 추방할 수 있다.’는 혁명권(革命權)이 있음 을 오늘날의 지도자들은 기억하기를 바란다.
다만, 언론의 기자들이 다른 어떤 직종의 종사 자들보다도 투철한 직업의식으로 돈과 권력, 이 해관계에서 자유롭고 정의로울 때만 가능한 것 이다. 찌라시 수준의 폭로성과 말초적사건 취재 만으로는 언론의 추락만이 있을 뿐이며, 국민으 로부터 언론이 위임받은 편집, 편성권은 100년 이 지나도 지금보다 나아질 수 없을 것이다. 언 론의 윤리강령을 지키는 기자들이 더욱더 많아 져 언론을 더욱 신뢰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문화유산 둘러보기 : (사)신라문화진흥원 부이사장 김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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