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경주 문무대왕릉(사적 제158호, 문화재청 사진)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이다. 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 ⓒ 황성신문 | |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 그 역시도 즉위하여 남산성을 중수하고 성안에 커다란 창고를 설치하였으며 3년에 걸쳐 부산성을 쌓고, 안북 하천 변에 철성을 쌓았다. 또 서울(경주) 에 성곽을 쌓기 위해 책임관리를 명령하였다. 이때 의상법사는 통일 이후에도 이렇게 힘든 상황이 지속되는 것에 대 해 왕에게 글을 올렸는데 그 내용이 [삼국유사] 에 기록되어 있다.
‘왕의 정치와 교화가 밝으면 비록 풀 언덕에 선을 그어 성(城)으로 삼더라도 백성들이 감히 타고 넘지 않을 것이며, 재앙을 물리치고 복이 들어오도록 할 것이요 만약 정치와 교화가 밝지 못하면 비록 만리장성이 있더라도 재해를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이에 왕이 공사를 곧 중 지하였다.
‘삼국사기’에 문무왕은 김유신의 임종을 앞에 두고 병문안 가서 말하기를 ‘나에게 그대가 있음 은 고기에게 물이 있음과 같은 것이다. 만일 피 치 못하고 그대가 죽음을 맞이하는 일이 생긴다 면 백성들은 어떻게 하며, 사직을 어떻게 하여야 좋을까’ 하고 물었다. 이에 김유신이 답하기를 ‘신이 보면 대통(大統)을 잇는 임금이 처음에는 정치를 잘 하지 않는 이가 없지 않지만 끝까지 잘 마치는 이는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대의 공적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없어지니 매우 통탄 할 일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성공이 쉽지 않음을 아시고, 수성(守成)의 어려움을 생각하시어, 소인을 멀리하고 군자를 가까이 하시어, 위에서는 조정이 화목하고 아래에서는 백성과 만물이 편 안하여 화란이 일어나지 않고 국가의 기반이 무궁하게 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왕이 울면서 받아들였다.
문무왕 자신 또한 죽음을 앞두고 유언하기를 ‘옛날 모든 일을 다스리고 살폈던 영주도 마침내 한 봉우리의 무덤을 이루고 만다. 시간이 지나면 풀 뜯는 아이들과 목동들은 그 무덤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무덤 옆을 뚫으니 무덤이라는 것은 한갓 재물만 허비하고, 꾸 지람과 비판만이 역사책에 기록될 뿐이며, 헛되이 인력만 낭비하고, 영혼을 오래 머물지 못하게 한다.
가만히 생각하면 마음이 애통하고 슬픔이 끝 이 없겠지만 이러한 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 다. 임종 후 10일에는 궁궐의 문 밖에서 서국(西國: 인도)식으로 화장하여 장사 지낼 것이며, 상례도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라. 그리고 변경을 지키는 일과 세금 징수는 긴요한 것이 아니면 모두 폐지하고 법령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곧 고치도 록 하라.’ 유언하였다.
어느 시대의 지도자이건 과도한 의욕에 따른 정책으로 국민의 세금이 늘어나는 사업이나 힘 없는 반대론자들의 의견을 묵살하는 정책을 강행한다면 시대를 불문하고 사람 사는 세상에서 는 똑 같은 불만이 가득할 것이다. 모든 지도자 들은 역사에 훌륭한 영웅으로 기록되기를 바라 는 마음에 사명감을 갖고 정책을 펼치지만 다수 의 국민들이 반대하는 일을 갖고 성공한 예는 드물었다.
더불어 권위와 명예를 지키려 노력하지만 권위와 명예는 권력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의 상법사의 충언처럼 국민을 위하는 애민(愛民) 의 마음이나 측은지심(惻隱之心)에서부터 시작 한다는 것임을 탄핵정국의 여야 정치인들과 우 리 모두는 ‘나는 정말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잘 하고 있는가’ 라고 한번쯤 되돌아 볼 때라고 생각된다.
문화유산 둘러보기 : (사)신라문화진흥원 부이사장 김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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