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정월대보름 도솔마을 달집 소원(2011. 2. 27) 4년 전 경주 도솔마을 주막 앞마당에 세워놓은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 재료더미에 어느 누군가 그 해의 바램을 붙여놓은 소원이 가슴 뭉클해 찍어둔 사진입니다. | ⓒ 황성신문 | |
‘설계두’는 [삼국 사기]에 따르면 신라 귀족가문의 자손이었다.
일찍이 친구 네 사람과 함께 모여 술을 마시면서 각자의 뜻 을 말하였는데 설계 두는 다음과 같이 말 하였다고 한다. ‘신라에서 사람을 등용하는데 골품(骨品)을 따지기 때문에 진실로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어도 그 한계를 넘을 수가 없다. 나는 원컨대 중국으로 가서 세상에 보기 드문 지략을 드날려 특별히 공을 세워 스스로의 힘으로 영광스러운 관직에 올라 의관을 차려입고 칼을 차고서 천자의 측근에 출입하며 만족하겠다.’ 무덕(武德: 당나라 고종의 연호 618~626) 4년 에 설계두는 몰래 바다를 통해 당나라에 들어갔 다. 그때 마침 태종 문황제(文皇帝)가 고구려와 의 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고구려를 정벌할 때 설 계두는 스스로 군인이 되어 참전하게 되었다. 황 제의 군대가 요동에 이르러 고구려와 싸울 때 고 구려 진영 깊숙이 들어가 민첩하게 싸우다가 죽 으니 그 공이 일등이었다. 황제가 눈물을 흘리면 서 우리나라 사람도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하여 좌우를 살피느라 앞으로 나가지 못하였는데 외국인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어떻게 그 공을 갚을까 하고 설계두의 시종에게 물었다. 시종은 그의 평생소원을 황제에게 말하였 고, 이를 들은 황제는 자신의 옷을 벗어 시신을 덮고 설계두에게 대장군의 관직을 주고 예로서 장례를 지내주었다.
신라사회는 신분으로써 철저하게 통제하였 던 골품제도하에서 설계두는 자신의 뜻을 이루 기 위해 위험을 무릎 쓰고 외국으로 나아가 자신 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천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우리사회는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신분의 차이를 비롯한 빈부격차, 사회적 편견 등으로 얼룩져 있다. 이로 인하여 모국을 등지고 타국으로 떠나는 우수한 연구인력과 세계적인 스케이트선수 안현수와 유도선수 추성훈씨와 같이 많은 분야의 인재들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 해 고국을 등지고 타국의 국민으로 살아가고 있어 우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신라가 폐쇄적인 골품제도로 인해 설계두와 같은 훌륭한 인재를 잃었던 과오를 범했다면 지 금의 우리는 과연 편견 없이 인재를 발탁하고 있는 것일까?. 또한 편견 없이 외국인들을 귀화시 켜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서 마음껏 뜻을 펼 칠 수 있는 미래의 한국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우 리는 노력하고 있는지 물음을 던져본다.
다문화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 역시, 수 천 년을 동일한 문화 속에서 생활해 온 우리민족에 게 타국, 타문화를 단숨에 받아들이기란 그리 쉬 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우리의 풍습이 익숙하듯이 다문화가족들에게는 그들의 문화에 익숙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그들의 문화와 풍속을 이해하고 꾸준한 지원과 배려를 한다면 그들도 우리의 문화를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 다. 보다 더 우선해야 할 것은 모든 인간은 평등 한 인격체로서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불어 국가와 민족, 인종과 종교, 학벌과 지역 등으로부터 편견이 없는 사회로 나아간다면 설계 두 처럼 한국으로 귀화한 사람들의 우수한 역량으로 한국사회는 더 풍요로운 문화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신라문화진흥원 부이사장 김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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