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박수량 백비(전라남도 기념물 제198호) 박수량의 묘 앞에 서있는 호패형 비석에는 글이 써 있지않은 백비이다. 조선 명종은 박수량의 청백을 알면서 빗돌에다 새삼스럽게 그가 청백했던 생활상을 글로서 쓴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청렴을 잘못 아는 결과가 될지 모르니 글을 쓰지 않고
상징적으로 백비를 세우도록 하였다고 전한다. | ⓒ 황성신문 | |
분경 ( 奔競) 이 란 , 분추경리(奔趨競利) 의 줄인 말로 하급관리가 상급관리의 집 을 방문해 관직을 얻으려고 서로 다투는 엽관행위나 청탁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 한 법이다. 고려시대 에는 분경금지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부터 청탁이 들어오면 뇌물을 받고 엽관하는 등 있으나 마나한 법률이었다. [고려사] 명종 14년(1184)의 기록을 보면 ‘간신들이 청탁하면 왕은 뇌물을 얼마나 받았는지 물어보고 많이 받았다하면 기뻐하며 그 청탁 을 들어주었고, 그렇지 않으면 날짜를 질질 끌며 뇌물이 많아지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반면에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관리들의 기강 을 바로잡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분경금지 법이 강력하게 실시되었다. 특히 조선은 태종 1 년(1401) 5월 삼군부(三軍府)는 무신의 집, 사헌부(司憲府)는 정치실력자의 집에 대한 분경을 규찰하는 명령을 내려 문무의 양반들이 분경금지 법이 유지될 수 있도록 철저하게 감시하였다. 또 삼군부와 사헌부에서는 아전을 시켜 그 집을 지키게 하여 사람이 찾아오면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 찾아온 이유를 묻지 않고 모조리 잡아가두 게 하자 사람들마다 불만이 일어나면서도 두려워하였다.
이러한 분경금지의 대상은 주로 왕족(王族)이 나 권력기관의 관료들에게만 해당되었으나, 정 작 왕족의 외척에 대해서는 분경금지의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다. 외척은 왕권과 귀족간의 분쟁 을 방지하는 완충 기능의 역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분경금지법은 왕비족에 대한 철저한 견제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한편 이것은 조선시대의 정치가 외척정치와 세도정치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경우, 뇌물수수는 뇌물을 주고받은 여부와 관련 당사자에 한정하여 법적인 처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분경은 지금과는 달리 돈이나 뇌물을 받아야만 성립되는 것이 아 니라, 권력수수와 매관매직을 성립케 할 가능성 이 있는 고위층 집의 방문 그 자체부터 적용되는 아주 엄격한 법체계였다. 또한 이 법을 위반하게 되면 자손대대로 공직에 취임 할 수가 없었다. 5 대 이내로 관직을 갖지 못하면 자연스럽게 양민으로 전락하던 시대였던 만큼, 가문의 양반신분 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도 분경금지법을 어기는 것은 무척 위험한 행위였다. 이러한 조치는 관직 의 독점 금지와 관직의 공공성을 높이려는 조선 초기 왕들의 정치철학이 반영된 것이다.
요즘 전직 대통령에 대한 뇌물수수 조사를 보면서, 분경금지에 대한 이행을 말로 아닌 실천으로 하였더라면 국민들의 실망과 더불어 눈살을 찌푸리는 상황이 연출되지 않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나라의 역대 최고 권력자들은 그들과 관련된 가족, 친척, 가깝게 지내는 지인들로 인하여 끊임없는 뇌물수수라는 사회적인 문제들로 ‘뜨거운 감자’가 되어 왔으나, 이것은 그들만의 잘못 은 아닐 것이다.
권력에 붙어서 살아야만 하는 절박한 사회구조와 가까운 사람의 청탁을 들어 주지 않았을 때 의 인간적인 비판을 받아야하는 일이 흔하기 때 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분경금지법이 시행되었 던 조선시대에도 부정과 부패는 여전히 있었지 만, 부정적인 방문과 만남이라는 근본부터 철저 히 관리하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청백리 까지는 되지 못하더라도 ‘분경금지(奔競禁止)’의 의미라도 잊어버리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사)신라문화진흥원 부이사장 김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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