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효자 손순이 살았던 곳에 세워진 1970년 유허비각 전경(경주시 현곡면 소현리 623) 고려
후기 일연이 1281년에 편찬한 [삼국유사]는 5권 9편으로 된 역사책이다. 그러나 일연 당시에 출간되었는
지는 불명확하며, 제자 무극이 1310년에 간행한 것이 전해오고 있다. 이 책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평가는
저자의 각고의 노력과 강한 역사의식이 스며있다고 평가한다. [삼국유사] 5권 마지막 9편에는 ‘효도와
선행’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그것은 일연 역시 지극한 효행으로 어머니를 모셨고, 또 세상 사람
들에게 효(孝)를 실천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당시 대표적이었던 효행을 기록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 ⓒ 황성신문 | |
[삼국유사]에 손순(孫順)은 모량리 사람으로 아버지가 죽은 후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아 곡식을 얻어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손순에게는 어린아이가 있어 매양 그 할머니가 먹는 것을 빼앗아 먹으므로 손순이 이것을 난처하게 여겨 아내에게 말하기를, 자식은 또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두 번 구할 수 없는데 잡수시는 것을 빼앗고 보니 어머님이 얼마나 배고파하시랴! 우선 이 아이를 묻어버려서 어머님이 배부르시도록 하자고 하였다.
그들은 곧 아이를 업고 취산(醉山)북쪽 들판으로 가서 땅을 파다가 문득 매우 이상한 돌종[石鐘]을 얻었다. 부부는 놀랍고 괴이하여 잠시 나무위에 걸고 한번 쳐보았더니 그 소리가 은은 하여 들을만하였다. 아내가 말하기를, ‘이상한 물건을 얻은 것은 아마도 이 아이의 복이니 아이를 묻어서는 안 되겠소’라고 하니 남편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곧 아이를 업고 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종을 들보에 달아놓고 쳤더니 소리가 대궐까지 들렸다.
흥덕왕이 이 소리를 듣고 측근들에게 말하기를, ‘서쪽 교외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맑고 은은한 품이 보통이 아니니 빨리 알아보라’고 하였다. 왕의 사신이 그 집에 와서 사연을 알 보고 자세한 사실을 아뢰었다. 이에 왕이 말하기를 ‘옛날에 곽거(郭巨, 중국 한나라 때 인물)가 아이를 묻으니 하늘이 금솥을 주었고 지금에 손순이 아이를 묻으매 땅에서 돌종이 솟아났구나. 전대와 후대의 효도가 한 하늘 아래 같은 본보기가 되었다’ 라며 곧 집 한 채를 주고 해마다 메벼 50석을 주어 지극한 효도를 숭상케 하였다. 손순은 옛집을 절로 만들어 이름을 홍효사(弘孝寺) 라 하고 돌종을 여기에 안치하였다.
현대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손순의 부모에 대한 효도에 감동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자식을 버리는 부모의 비정함에 냉혹함마저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생명의 존엄이 오늘날과 비교해 고대사회가 아무리 낮다고 하여도 자식에 대한 애정은 오늘날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 시대의 사회문화가 자식보다 부모에 대한 효행을 우선시 하였던 사회임을 감안한다면 그리 낯설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효행이야기다. 부모를 잘 봉양하기 위해 자식마저 버릴 결심을 했던 손순의 효행에 관한 일화가 더 이상 현실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40대 후반의 중년친구들에서 또 노년층에 이르는 선배들로부터 종종 농담처럼 또 푸념처럼 듣는 이야기로 ‘우리는 부모님을 모시는 마지막 세대요, 자식에게 버림받는 첫 세대’ 라는 말들을 한다. 더불어 듣는 많은 이야기 중의 하나가 장남과 맏며느리들의 고충이야기이다.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 토막을 해 보자면, 결혼 전 나의 어머니는 노동과 병마로 오랜 기간 싸우시다 돌아가셨고, 아버지 역시 시골에 홀로 계시다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병간호와 아버지를 모시며, 친척들의 길흉사로 나의 맏형과 형수님은 결혼 후 주말이라고는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계시던 아버지마저 돌아 가셨을 때 슬펐다. 그 슬픔은 살아가면서 잊혀지지 않고 문득 문득 되살아난다. 아버지를 흙 속에 묻고 나서 나는 자유롭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초록색이 짙어오는 5월이 오 면, 카네이션 꽃만 보면 나는 ‘병마와 싸우시는 부모님이라도 살아계셨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해본다. 문화유산 둘러보기 : (사)신라문화진흥원 부이사장 김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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