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가 피기 시작하는 4월과 아카시아 꽃이 만발한 5월이 오면, 내게는 늘 아카시아 향기와 같은 아련한 향수와 더불어 신라시대의 폐사지인 석장사터[錫杖寺址]가 떠오른다. 석장사는 하늘의 별처럼 수없이 많은 신라시대 사찰 가운데에서도 유서 깊은 사찰로, 오래전부터 역사학계와 미술 사학계, 그리고 국문학계에서 비상한 관심과 연구의 대상으로 주목 받아온 곳이다.
석장사라는 절 이름은 [삼국유사] 기록에 ‘양지스님이 지팡이 머리에 포대기를 달아 놓으면 지팡이가 저절로 시주하는 집으로 날아가, 지팡이를 흔들어 소리가 나면 그 집에서 이것을 알고 재 올릴 비용을 집어넣어주고. 자루가 다 차면 날아서 되돌아왔기 때문에 그가 사는 절 이름을 석장사(지팡이 절)라 하였다.’ 한다.
한편, 이 절의 주지로 있던 양지스님에 대해서는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석장사에 머물면서 진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삼천불전을 조성하여 절 가운데에 안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묘사의 장육상과 사천왕사의 탑 조각상 등 불멸의 예술품을 제작하였다. 그때 만든 작품은 1300년이 훨씬 더 지난 오늘날 까지 전해져오고 있어 우리를 감탄케 하 고 있다.
석장사는 조선후기 어느 시점에서 허물어진 후 도굴이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비바람에 의 해 지형의 변화가 진행됨에 따라,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박물관에서 1986년 봄과 1992년 가을에 걸쳐 2回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던 곳이다. 1986년의 1차 발굴조사는 아무것도 모르는 대학 2년생이였던 내게 처음 접하는 발굴조사였을 뿐만 아니라 그 후 책임연구원으로 발굴조사를 마무리하였던 내게는 인연이 깊은 유적이다. 어쩌면 석장사와의 인연으로 역사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아직까지 박물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석장사는 늘 내가 걸어온 학문의 길 입구에 사천왕처럼 버티고 서 있다.
발굴조사결과 석장사는 아담한 산능선으로 둘러쌓인 자그마한 암자 규모의 산지가람임이 밝 혀졌고, 출토유물로는 백자 바닥면에 묵서(墨書) 로 ‘錫杖’이라는 명문이 있는 자기(磁器), 금동불 과 흙으로 빚은 신장상, 기와 등이 다수 수습되었다. 특히 다양한 탑과 불상이 새겨진 전(塼: 흙으로 만들어 불에 구운 벽돌), 연기법송탑상문전(緣起法頌銘塔像紋塼)은 그 유례가 드물 뿐만 아니라 뛰어난 예술품이다.
발굴조사 후 무서울 만큼 끈질긴 생명력으로 유적을 점령해가고 있는 아카시아 나무와 잡목 을 제거해오고 있어 이제 아카시아 나무는 없지만, 그 자리를 대신하여 해마다 칡넝쿨과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절터의 모습을 삼켜버린 채 늘 변함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발굴조사 후 대부분의 유물들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이관되었고 석재유물만이 남겨져 있는 석장사 터를 볼 때마다 자식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노쇠하게 밀려나 있는 우리 부모님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러나 석장사는 천년을 훨씬 넘긴 세월을 견디어온 유적의 연륜 때문일까? 석장사를 다녀올 때면, 힘들고 지칠 때 고향을 다녀온 듯 힘이 생기는 곳이기도 하다. (사)신라문화진흥원 부이사장 김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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