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성덕대왕신종(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국보 제29호, 문화재청) 이 종은 신라 혜공왕 7년(771)에 완성되
었으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큰 종이다. 높이는 3.66m, 무게는 약 18,908kg에 이른다. | ⓒ 황성신문 | | 한국 종(鐘)은 중국종을 모방하여 만들어 졌지만 8세기에 들어와서는 한국 종의 양식과 특색을갖추기 시작하여 어느 나라에서도 비교할 수 없고 따라 올수 없는 세계 최고의 금속공예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한국 종의 전형적인 양식과 형태를 갖추고 있는 종은 성덕대왕신종이다.
성덕대왕신종은 [삼국유사]에 따르면 성덕왕이 죽은 후 아들 효성왕이 부왕의 명복을 기원하는 봉덕사를 창건하였고, 효성왕의 동생 경덕왕도 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청동 12만근을 모아 종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죽자,경덕왕의 아들 혜공왕이 종을 완성하여 봉덕사로 옮겨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 종을 ‘봉덕사 종’이라고도 불린다.종의 표면에는 1천자 가량의 글자가 돋을 새김으로 새겨져 있고 그 주위로 향로를 든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다. 글에는 신종을 만든 목적과 과정,그리고 신라왕업을 찬양하는 시와 신종제작에 참여하였던 관직과 이름 등이 기록되어 있다.
성덕대왕신종의 또 다른 이름의 하나가 ‘에밀레종’이다. 이렇게 불리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 때문이다. ‘온 백성의 성의를 모아 종을 만들기 위해 전국의 고을마다 시주승이 전국을 다녔다.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좋은 날을 택하여, 쇳물을 부었으나 매번 금이 가고 깨어진 소리가 날 뿐이었다. 장인들과 신하, 스님들은 모두 낙심하고 있는데, 어느 날 점치는 일관이 와서 이 신종을 완성하려면 사람의 희생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속세의 물욕과 때가 묻지 않은 어린아이를 쇳물 속에 넣어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어느 누가 귀한 자식을 희생양으로 시주를 하겠는가, 참으로 난처한 일이었다. 이때 한 스님이 작년 구리를 시주 받기 위해 어느 마을로 갔더니 어느 가난한 집에서 귀여운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이 있어 시주를 청했더니 우리 집의 재산이라고는 이 아이 뿐인데 이 아이라도 받아간다면 시주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신하들과 스님들은 부처님을 속일 수 없는 일이라 하여, 아기를 강제로 데려다 끊는 용광로 속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쇳물을 부었다. 그 처럼 애를 먹이던 종이 이번에는 금간데도 없고 구멍도 없이 훌륭한 신종이 이루어졌다. 종각에 달고 종을 쳐 보니부드럽고 맑은 소리가 서라벌 장안에 울렸는데, 그 소리에는 ‘에밀레’하는 애처로운 소리가 섞여 울리는 것이었다.
엄마 때문에 쇳물 속에 녹아 종이 된 어린아이의 슬픈 하소연이 종소리에 섞여 울려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종을 ‘에밀레종’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에밀레는 ‘어머니의 말 한마디로’라는 뜻이라고 한다.
성덕대왕신종에 ‘에밀레 종’이라는 별명이 붙은 시기는 일제감점기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이전의 어떠한 문헌에서도 성덕대왕신종을 에밀레종이라고 한 자료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1925년 8월 5일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창착 문예란에 렴근수라는 무명의 이름으로[어밀네 종]의 동화가 실려 있어, 이것이 ‘어밀네’를 처음 확인 할 수 있는 자료이다. 그러나 이 ‘어밀네 종’이 ‘성덕대왕신종’을 가리키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조선에 선교사로 왔던 헐버트의 글속에는 에미(em-mi, 엄마)라고 부르는 커다란 종이 서울 중심에 있다(...thegreat bell thathangs in the centre of seoul...)고 기록한 것을보면, 서울 종로 종각에 걸려있던 옛 보신각 종으로 추정된다.
이 종은 1468년(세조 14)에 주조되어 처음 정릉사에 걸려 있다가, 원각사로 옮겨진 후 임진왜란으로 사찰이 불타자 현재의 위치를 옮겼고 고종 때 종루에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걸게 되어1985년까지 제야의 종으로 사용되었다. 옛 보신각 종은 보물 제2호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현재의 보신각 종은 신라 성덕대왕신종을 복제하여 사용하고 있다.
(사)신라문화진흥원 부이사장 김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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