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황성신문 |
|  | | ↑↑ ▲ 새보의 보금자리 | ⓒ 황성신문 | | 새보〔新洑〕는 네 번째 이사해 살던 곳이었다. 고향에 보가 일곱 개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늦게 만들었다고 ‘새보’라 했다. 새보는 말만 들어도 보중에 제일 최근에 만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송계(松谿) 어르신이 새 터를 잡은 바로 그곳이었다. 집이 모두 열두 동이고, 종형 집, 이웃집이라고 기장 댁(機張宅) 한 집이 더 있었다. 모두 열네 동이 작은 마을을 이루며 살았다. 1956년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 해에 아버지가 손수 지으신 작은 마을 ‘새보동네’에 가서 살게 됐다.
우리가 살았던 집은 네 동이었다. 큰 채, 사랑 채, 방앗간, 헛간 등이 있었고, 나머지 여덟 동은 모두 한 동씩 세를 내어 줬다. 아버지는 목수를 하면서 농사짓는 반 농, 반 목수이었다. 집도 당대에 4천여 평의 밭을 사 두어서 밭둑에 버드나무 심어 두었다. 그 나무가 기둥이 될 크기로 자랐을 때 이 부지에 집을 집단적으로 손수 지었다. 앞집인 종백씨(從伯氏) 집까지 지어 주었다.
새보 보머리는 세 번째 살던 집 앞 마을입구에 있었다. 우리 집은 말이 새보이지 중허리에 위치해 있었다. 흔히 그곳 명칭이 새보라고 했다. 새보 머리에서 물이 잘 흘러나와 이 물이 조양 못으로 모여들어 갔다.
조감해 보면 북쪽에 기장 댁은 언덕아래 두 동이 기역자로 있다. 둘레에는 밭으로 뽕나무가 경계를 알려 줬다. 앞으로는 서편에서부터 여덟 동이 차례로 들쑥날쑥하게 집을 잘 배치했다. 서로 간에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어긋나게 지어 놓았다. 우리가 사용하는 집은 네 동으로 북쪽에 큰 채, 서편에 사랑채가 있었다. 동편에 방앗간(=디딜방아)이 있었다. 사립문 쪽으로 앞에 헛간을 연속으로 지어 두었다. 허드레 물건을 넣고 건초, 거름(=재, 소 거름) 등을 모으는 역할을 하는 곳이 됐다.
위 동네, 아래 동네에서 우리 집을 통칭으로 ‘새보 집’으로 통했다. 우리 집만 지칭할 때 택호는 ‘송계댁’이요, 별칭으로는 ‘해당화 집’이라고 했다. 집을 열네 동이나 짓고도 버드나무가 남아서 4천여 평 밭 둘레에 간간히 듬성듬성 버드나무가 서 있었다. 버드나무에 광석라디오 안테나를 달아 놓고 그때는 최고(?)의 문화이기이듯 이를 활용했다. 집에도 역시 작은아버지 밭 경계에 뽕나무가 있었다. 우리 밭 중간마다 고르게 감나무 열세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간간히 가죽나무와 고욤나무 세 그루가 양념조로 심어져 있었다.
새보는 새 부자가 나는 터라고 했다. 그러나 부자는 못 되었고, 그냥 밥 먹고 살 정도이었다. 시골에서 논이 일흔 마지기 정도 됐다. 이백 석지기다. 큰머슴, 중머슴, 작은(꼴)머슴이 있었고, 소가 열한 마리나 됐다. 초등학교 다니면서 소꼴 때문에 낮에는 소 풀베기를 했다. 물론 머슴들은 먼산, 중산에 가서 나무를 해 와야 했다. 밤이 되면 머슴들은 힘들여 가면서 여물 썰기 내기를 했다. 끝나자 말자, 짚공예로 제일 많이 하는 것이 새끼 꼬기이었다. 가마니 치기용으로는 가는 새끼이고, 지붕 이우기용은 굵은 새끼를 꼬아야 했다.
우리 집은 들판 가운데에 있었고, 불국사기차역 앞에는 소도시이었다. 전형적인 농촌이었으므로 관광지 불국사를 무전여행으로 찾아왔다가 돈이 떨어지면 농촌으로 찾아들었다. 아버지는 절대로 그냥 밥을 주지 아니했다. 사전에 약속해서 밥을 주었다. 2∼3일간 일하고 밥 먹고 가라는 것이다. 나는 여름방학에 무전여행 온 대학생들과 친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 사람들이 살고 있을 발전된 도시에서의 생활하며, 그들 삶 중에서 문화를 엿들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하루 스무여 명이 식사를 하는 집이라 매일 잔치하는 기분이었다. 밥상은 개별 밥상을 차려 주는 것이다. 마치 잔치를 하면 도판차려 개다리 밥상을 차례로 준비해 둔 것과 같다. 수저 놓고, 기본 반찬을 접시에 똑같은 순서로 놓는다. 국, 밥을 퍼 담으면 일시에 상이 차려진다. 머슴들은 사랑채, 토방, 큰방, 머릿방 등 차례로 상 나르기 해 식사가 시작된다.
농사철이 아닌 저녁에는 밥을 일찍 먹기 때문에 큰 채 처마에다 남폿불을 달아 불을 밝혔다. 전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불 하나로 모두가 단체생활을 했다. 개별 방에 불을 밝히지 아니했다. 기름을 절약하는 방안이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불을 켜지 못하므로 일찍 자게 했다. 새벽 네 시면 모두가 일어나야 했다. 군대라도 보통군대가 아니었다. 우리 집에 오신 손님들까지도 똑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 누가 산 위에서 내려 본다면 그 집은 참 희한도 하다할 것이다. 밤에 불을 적게 밝히는 반면에 새벽만 되면 불을 훤히 밝혀댔다. 아침 운동으로 윗마을까지 가서 개똥을 모아 오도록 했다. 우리 집 남자들은 이 과정이 매일 생활화돼 있어서 전 자동이었다. 이를 행하지 않는 사람은 먹을 것을 거부당해야 했다. 정말 조심해야 했다. 새보사람들은 무서웠다. 그래도 푸른 들판 속생활은 나날이 즐거웠다.
숙달이 되고나면 몸이 참 개운해졌다. 저녁에 일찍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은 건강유지에도 좋다. 자기 몸에 음식이 맞지 않아서 배탈이 나면 병원도 안 가고, 아버지의 만병통치약 일곱 알을 받아서 먹었다. 약과 함께 물을 마시고 나면 배 아픈 것이 저절로 나아 버렸다. 새보에서만 처방하는 특효약이었다. 그 약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이른 봄에 돋아나는 풀을 뽑아 고아서 환을 만든 것이다. 약이, 약이 아니라 약 먹었다는 자기위안에서 나았지 싶다.
여덟 집 세 들어 사는 사람들에게 월세로 돈을 받지 아니했다. 무료는 아니고 단지 한 달 살고, 하루 농사일로 대치해야 한다. 8집×12일=96일분 농사철 일꾼이 생기는 것이었다. 정작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은 현금을 내지 않아서 좋았다. 일하면 점심, 새참 먹고, 담배 한 갑까지 주니 오히려 내일에도 일을 더 하려고 했다. 아버지는 머리를 비상하게 잘 활용했다.
새보에서는 열심히 일만 하는 집이 있었고, 여러 사람들이 함께 먹고, 살고, 일하고 공동으로 살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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