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황성신문 | | 안태본에서 네 번째로 이사와 함께 판 우물 있는 집이 바로 새보 초가삼간이다. 부속 건물로 디딜방앗간이 있고, 모양새가 길쭉한 헛간이 있어서 참 편리하게 사용했던 기억이 난다. 큰 채, 사랑 채 등으로 사대부 집안은 아니지만 한 해 한 번 농사짓고 이엉 엮어 올려 언제나 깨끗한 초가삼간이다. 저 푸른 들판 속 그림 같은 초가삼간이다.
유행가 가사에나 나올법한 명칭이겠지만 그때는 초가삼간 집이라도 마련하고, 일하면서 먹고 사는 평범한 시골 촌사람이라도 괜찮다. 그렇게 가장 떳떳한 삶을 사는 사람 축에 들어갔다. 초가삼간에 덧붙여서 비록 천수답이지마는 일흔 마지기 논농사에 사천여 평 밭뙈기와 구천여 평의 야산까지 있어 일하는 즐거움으로 살아갔다.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를 거치면서 일상을 살아가는 향촌 소시민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안빈낙도의 길이다. 마을에는 아직 전기도 안 들어왔고, 모기약도 없는 시절이다. 열한 마리의 소와, 서너 마리의 개와 이십여 마리의 닭들이 마당에 흩어진 곡식을 쪼아 먹는다. 한가로운 초가삼간의 생활이다. 줄줄이 아이 낳아 방마다 가득가득 사람들이 득실거리고, 이방인처럼 머슴 초당이 따로 있어 항상 시끌벅적한 초가삼간이다.
봄 되면 먼 산에 큰 머슴이 셋째형과 물거리 시테바리를 하러 간다. 중 머슴과 넷째 형은 중간 산에 아찰이 나무하러 간다. 큰 머슴, 중 머슴과 함께 하는 형들은 어머니가 사 주는 초백이 챙기기도 바쁘다. 초백이는 대나무 껍질로 엮어 만든 도시락 바구니이다. 그 곳에 밥 한 가득 담고 가장자리에 고추장 종지기 하나를 쿡 눌러준다. 초백이 뚜껑 닫으면 훌륭한 점심바구니가 된다. 혹시 쏟아질까 봐 노끈으로 가운데를 한 번 질끈 묶어주는 마음 씀씀이는 그 누구도 못 따라 올 명품(?) 씀씀이다. 자그마치 초백이 네 개를 한꺼번에 준비해야 하는 어머니와 셋째 누나의 손길이 매우 바빠졌던 것이다.
서당에 다녀오는 10시 반 이후에 작은(꼴)머슴과 나는 가까운 우리 산으로 지게에 가마니와 갈퀴 얹어 낙엽 긁어모으러 간다. 우리는 가까운 곳이라 자주 들락거려서 하루 세 번 이상 낙엽을 그러모아 와야 한다.
중 머슴과 넷째 형이 먼저 집에 돌아온다. 송기를 끊어 얹어왔다. 송기 하나 얻어먹는 것도 어려웠던 시절이다. 어머니가 보고 그것을 벗겨 송기떡 만든다고 아예 먹지 못하도록 한다. 그때는 무척 아쉬웠다. 나중에 송기떡을 만들어 주었다.
늦은 시각에 큰 머슴과 셋째 형이 돌아온다. 큰 머슴은 나무를 많이 해 왔다. 진달래꽃 한 아름 꺾어 꽃방망이를 만들어 나에게 주었다. 초가삼간에 이렇게 즐거운 날이 없다. 한쪽에서는 송기 벗기고, 다른 쪽에서는 진달래 꽃잎으로 화전 붙인다. 집안이 온통 왁자지껄하고, 정말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나는 그러한 곳 초가삼간 속의 행복이 쏟아진다.
밤이면 큰 채 처마 밑에 남폿불 밝혀 달아놓는다. 마당 전체를 비춘다. 멍석 깔고도 앉을 자리가 모자라면 아이들에게는 밀 방석 내어놓았다. 어느새 어머니와 셋째 누나는 감자와 고구마, 옥수수를 삶아 내어준다. 혹시 목이 메일까보아 오이냉채 국을 내거나 수정과를 가져온다. 아이들은 그것도 모자라서 밀 볶아 수시로 주전부리하도록 한다. 한가한 시골 저녁시간이다.
우린 형제가 많다. 큰 누나, 둘째 누나 모두 시집갔다. 일손이 모자라면 어린 나라도 부려 먹어야 속이 시원한가보다.
“우물에 물 길어 오너라!”
“쇠죽 다 끓였으면 구이에 좀 퍼다 주어라!”
“날 어두워진다. 남폿불 켜라!”
“닭 올라간다. 홰 갖다 대어라!”
“강아지 허기질라. 밥 좀 줘라!”
“외양간 바닥 짚을 깔아라!”
“모기 많다. 왕겨더미에 모깃불 놓아라!”
초가삼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 꼬맹이를 못 부려 먹어서 안달이다. 하나같이 나를 찾아 불러댄다. 막상 먹을 것 있을 때는 날 부르지 않는다. 넷째 형이 쇠죽 끓이고 난 후 사랑채 부엌 잔불에 감자 구워서 혼자 먹다가 나에게 들켰다. 왠지 시커멓게 굽힌 작은 감자 서너 개를 던져준다. 큰 채 부엌에서 먹고 남은 고추전이 있으면 셋째 누나 먹으려다가 꼬맹이인 나의 입에 먼저 넣어준다. 아버지는 사랑방에서 고욤 재어 둔 것을 한 숟갈 퍼서 입에 넣어 준다. 셋째형 홍시 먹다가 한 입 베어 먹으라고 한다. 초가삼간에 사는 사람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마음이 모두 다 좋아졌을까? 그렇게 초가삼간에 사는 것으로 즐겁게 살았다.
기억으로나마 그 때 그곳에 살았던 초가삼간의 생활을 잊어버리지 못한다. 지금은 우리가 살았던 초가삼간이 헐리고 대형 우사(牛舍)가 들어 와서 새보 부자가 돼 살고 있다. 기장댁 집은 경지정리로 흔적도 없어졌다. 아직 종백씨 집은 그 터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현대식으로 많이 수리돼 그 옛날의 돌 자갈밭 위에 아버지가 지어 준 집이 아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초가삼간은 예전에 내 마음에 쏙 드는 새보의 대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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