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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차성이씨 양세(경주 손씨․경주 최씨) 정려각 | ⓒ 황성신문 | |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열행(烈行)과 효행(孝行)으로 다져진 나라이다. 그러나 이를 지키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홍살문만 있다고 꼭 열행을 지킨 것은 아니다. 홍살문 하사 받고서부터 가문을 지켜야하는 여인네들은 얼마나 많은 아픔을 갖고 있을 것인가?
차성이씨 양세 정려각(兩世旌閭閣)은 열행이나 효행 중 한 분야에만 뛰어나도 그 정려(旌閭 : 예전에 충신․효자․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그 동네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일을 이르던 말)를 세워 국민들의 귀감이 되도록 해 왔다.
여기 차성(車城) 이씨* 호군공파 37세(世) 경기(慶記, 혹은 慶重)의 처 경주손씨의 열행과 그 자부 경주최씨의 효행으로 열과 효를 동시에 얻었다. 이를 기리기 위해 근세조선 순종(純宗) 2년(戊申, 1908년)에 국민의 귀감을 삼고자 관급자재를 내려 양세 정려각으로 건축하게 했다.
차성이씨는 신라 월성이씨에서 분적(分籍)해 차성〔시조:諱李渭, 차성은 현재 부산 기장(機張)군의 一名, 차성지명은 삼한시대 甲火良谷縣〕으로 계대했으며, 이곳 경주 불국사지역에서는 판관(判官)공파와 호군(護軍)공파가 200여 년 전부터 집성촌(馬洞․時來洞)을 이뤄 세거해 오고 있다.
불국사 고장 주요기념물로 지정된 ‘차성이씨 경기의 부인 경주손씨·자부 경주최씨 양세 정려각’의 위치는 현재 불국사공설시장 입구 도로변에 있다. 어렸을 때는 잘 모르고 지났는데, 정려각을 아버지는 꼭 ‘열녀각’이라 불렀다. 공부하고 보니 ‘정려각’이 맞다. 정려각 곁에 관리사(舍)가 있는데 왕고모가 그 곳에서 살았다. 살아계실 때는 추석이나 설이면 밀개산에 성묘하고, 왕고모 댁에 모두 들렸다. 돌아가시고도 왕고종형이 있어 그래도 출입했다. 정려각 안에 들려서 풀도 뽑고 흘러내린 기왓장도 고쳤다. 잘 모르는 한문 글자만 있는 비신도 열심히 닦았다.
경주시청 문화관광국에서 입간판도 세워서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학생들이 찾아오곤 했다. 왕고종형을 통해 청소도 자주 하도록 해서 간혹 관에서 확인 차로 나오는 대비도 하게 했다. 또, ‘대한민국 충의효열록’ 발간위원회에서 원고청탁이 와 감히 내용을 작성해 제출했다. 현대화된 책에 시청에서 세워 준 입간판 내용으로 게재했다. 발간된 그 책을 받았을 때는 훌륭한 나의 조상, 그 높으신 효와 열의 뜻에 깊은 감사를 드렸다.
차성이씨 족보 내용으로 알고 보니 부인 손씨(1848∼1908)는 나에게 재종조모가 되고, 자부 최씨(1863∼1926)는 재종숙모이다. 사실상 관계는 더 가까웠는데 선대인 증조(曾祖 諱慶淵)가 양자로 왔기에 친척관계가 멀어진 것뿐이다. 생가로는 바로 종조모요, 종숙모가 된다. 입간판에 안내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 려 각
이 각은 차성(車城) 이경기(李慶紀)의 처 경주손씨의 열행과 그 자부(萬祚의 처) 경주최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각이다. 손씨는 어릴 때부터 효심이 지극하고 부덕을 겸비해 이웃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아왔다. 출가 후 시부모와 남편 봉양에 정성을 다하던 중 남편이 병상에 눕게 되자 정성을 다해 병을 간호했으며, 의원의 말에 따라 가물치가 특효라 했으나 엄동설한이라 구하기가 어려웠다. 이웃 못에 가서 아침저녁으로 얼음을 치며 통곡하니 깨어진 얼음 구멍에서 많은 가물치가 뛰어나와 이를 약으로 쓰니 효험이 있어 연명했으나 백약이 무효해 식음을 전폐하매 죽음에 이르렀다. 이 때 손씨 부인은 남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손가락을 잘라 생혈을 입에 넣었으나 끝내는 운명했다. 이를 당한 손씨 부인은 놀라움과 괴로움을 못 이겨 애를 태운 끝에 기절했다. 이를 본 그 자부 최씨 부인은 위급한 시어머님을 구하기 위해 역시 손가락을 잘라 생혈을 시어머님의 입에 드리워 회생케 했으나 결국 병상에 눕게 돼 운명을 하게 되니 예(禮)를 다해 장례를 지냈을 뿐 아니라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머리에 빗을 대지 아니했다. 이러한 고부간의 열(烈)과 효(孝)는 순종(純宗) 2년에 지방을 순시하던 암행어사에 의해 장계를 올려 조정에서 알게 돼 국민의 귀감으로 삼기 위해 건축 자재를 관급으로 건립했다.
고향에 들릴 때마다 양세 정려각을 들여다보고 온다. 언제부터인가 경주시청에서도 돌보아 주지 않아 입간판 글씨도 터 갈라져 못 알아보고 말았다. 이제 왕고종형도 돌아가시고 양세 정려각 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을 뿐이다. 특히 현재는 그 입간판조차 삭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다. 사람들이 너무 무심하다. 이곳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만들어 두어서 후손으로서 부끄럽고 황당무계할 뿐이다. 이제 우리 후손들에게 무슨 교훈을 전해 줄 것인지 의문스럽다.
대신에 이 글이라도 남겨두어 후일에 한자로 된 비석내용이라 몰라서 쩔쩔맬 때를 대비했다. 이제 졸고라도 유용하게 쓰일 것을 유일의 기대라도 하고서 감히 글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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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성이씨 족보’ 37세 이경중, 38세 이만조.
子 慶重, 諱慶紀 憲廟丙午生 高宗壬辰八月九日生 墓馬洞卯谷子坐 配月城孫氏鍾崙女 戊申四月二十日生 以烈行聞于朝 命旌閭在時來路傍 丙寅十月二十日卒 墓乾位左癸坐.
子 萬祚 字君淑 哲廟癸亥生 己未二月卒 墓陽北丸谷冷水嶝酉坐 配月城崔氏 癸亥生 以孝行聞于朝 命旌閭姑婦合閭 癸酉二月二十四日卒 墓釜山九德山坤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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