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황성신문 |
|  | | ⓒ 황성신문 | | 나 때는 집에서 고무신 신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싼 고무신을 집에서까지 신으면 돈이 남아나지를 않는다고 늘 말씀하는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새하얀 백 고무신은 언제 신는가? 초등학생은 학교 갈 때, 어른들은 남의 잔치나 행사가 있을 때만 끄집어내어 닦고 닦아서 신을 수 있다.
평소 집에서는 아버지, 어머니 모두가 짚신 신었다. 형님, 형수, 누나, 머슴 셋 등 모두가 짚신 신고 생활했다. 어린 나도 자연히 따라 짚신을 신어야 했다. 사실상 맨 발바닥에 짚신이 생활필수품이다. 아버지는 손수 나막신을 만들어 신는다. 비가 올 때는 나막신을 신거나, 아예 나다니지 못하도록 했다.
꽃신은 색실과 노끈으로 한없이 멋을 부려 만들었기에 귀한 아씨들이 신으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어린 우리들에게도 스스로 짚신을 삼아 신으라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짚신을 삼아 신었지만 그 모양은 태가 날 리 없다.
내 신발은 내가 배워서 만들어 신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짚신 삼는 방법을 배운다. 짚신은 가는 새끼를 꼬아 자기 팔 두 번 반 정도 길이로 결정해 한 번, 두 번 겹쳐서 오른쪽 엄지발가락 사이에 끼운다. 나머지 부분은 허리춤에 묶는다. 새끼줄 네 가닥 사이로 짚 엮어서 끝이 바깥으로 엮여 나왔을 때 고를 빼 신총을 만든다. 신총도 발의 크기 반까지 엮였을 때 그만 빼고 발끝 길이에서 마지막 두 갈래로 엮는다. 적당한 길이에서 양 갈래로 벌려서 뒤에 신총을 만들어 신발 중간에서 앞쪽 신총의 고에다가 연결했다. 신발 코 부분에서 서로 마무리하면 짚신이 됐다.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 짚신을 신고가면 안되니까, 고무신을 사 달라고 졸랐다. 마침내 신발을 사 오셨다. 그것도 검정고무신 왼발 두 짝이다.
“아버지, 왜 왼발 짝만 골라 사 오셨습니까?”
라고 여쭤 보니까 당신 대답이 정말 대단했다.
“야야! 바쁜데 시간도 없고, 흔틀 고무신전에 사람이 하도 많아서 손에 잡히는 대로, 모양이 바른 것 두 짝을 쥐다보니까 요놈들이 잡혔지. 신어봐라. 그러면 (모양이)발라진다, 그라면 됐지? 뭐가 그리 포시라분 소리 하노?”
맞습니다. 맞고요. 왼쪽, 오른쪽 모양이 따로 놓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 당신의 생각이다. 왼쪽 두 짝 검댕고무신이라도 신으면 괜찮았다. 그것도 짚신을 신다가 매끄러운 고무바닥에 살갗이 닿았다. 왼쪽 두 짝이면 어떻고, 모양이 비슷하고 안 찌그러지면 되지 않은가? 짚신 신다가 그것도 검댕고무신이 어디인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 다닐 때 시월 시사(時祀)를 지내려고 양북(오늘날 문무대왕면)까지 16km를 산으로 걸어가야 했다. 물론 돌아 올 때는 경주시내까지 시외버스를 탔다. 시내서 집까지는 시내버스가 있다. 가긴 걸어가야 했고, 신발은 없고 짚신을 신어야 하는데, 그것도 동대봉산을 넘어야 한다(8km). 비포장 신작로(8km)를 지나가야 하는 원거리 걸어서 갔다.
중간 중간에 들러 시사를 모셔야 한다. 아예 짚신 다섯 켤레를 삼아서 괴나리봇짐에 묶어 달고서 출발했다. 평지에는 짚신을 신고 걸어도 괜찮은 데 산에는 바른 길이 없다. 가다가 나무 등걸에 갈리면 곧장 찢어져서 못 신게 된다. 지고 가던 새 짚신을 내어서 갈아 신고 가야 했다.
서당에 다닐 때도 맑은 날 짚신은 그런대로 신고 다니기에 편했다. 문제는 비오는 날이다. 비오는 날 짚신 신으면 물에 젖어서 무거워졌다. 뿐만 아니고 짚신 바닥에 흙이 달라붙게 된다. 또 나중에 비가 안 올 때 신으려면 쉬 마르지도 않아 시간도 걸리고 말라도 무언가가 마뜩하지 않아 비오는 날 신은 짚신이 좋지 않다. 양말 벗고, 나무 바닥 앞부분에 구멍을 뚫어 끈을 좌우로 묶어내어 발가락을 엄지와 검지사이에 끼워 신발을 대용하고 다녀야 했다. 흔히 왜말로 게다[geta]와 비슷했다.
현대화된 고무신과 운동화, 구두가 나오고 해도 시골에서는 몰라서 안 신은 게 아니라 돈이 없어 못 신었다. 많은 식구들 신발 사기가 돈 때문에 겁내 했다. 짚신은 신어서 편하기는 한데 도시에 나가려면 부끄럽고, 드러내 놓고 다니기가 매우 거북했다. ‘스스로 나는 촌놈이요’하고 마치 외고 다니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도시에 나가려면 아끼고 아끼던 고무신을 닦고, 닦아서 신고 다녔다. 도시에서는 벌써 좋은 운동화나 구두를 신고 다녔기에 고무신 신고서도 ‘스스로 나 촌놈이요’하는 격이 되고 말았다.
촌에서 태어났으니 촌놈이고, 촌놈이면 어떻고 촌놈이 되어 살아도 밥 한 그릇이다. 도시 놈 되어 살아도 밥 한 그릇이다. 짚신 신고 다닌다고 별 어려움은 없다. 오히려 발이 편하고 이제 보니 얼마나 우리 선조들이 과학적으로 신발까지 만들어 신었으랴. 조금의 기술만 익히면 스스로 만들어 신고 경제적으로 해결도 됐다. 꽃신을 신으면 그때는 양반집 자제로 쳐 주지 않았든가?
어렸을 때 가정경제도 그러했고, 사회적으로는 농촌에서 짚신 신는 게 뭐 그렇게 욕먹을 일도 아니다. 그렇게 농촌에서 발에 흙 안 묻히고 살면 되지. 뭐 별다른 게 있을까 보냐?
나중 이야기지만 어렸을 때 짚신 신고 다녔다니까 내자가 아프리카 부시맨족인 줄 알았다고 조롱한다. 그것이 결코 조롱의 대상도 아니요, 사람으로서 사람 구실만 잘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빗대어 나무랄 필요도 없다.
나대로 어릴 때의 삶이 있고, 아버지의 철학이 있기에 그걸 그렇게 신고 살았다. 짚신은 발이 참 편했고, 공기가 잘 통해 무좀 걸릴 필요도 없다. 조금 전 시대까지 신었던 우리 조상들의 짚신은 과학적이고 정말 좋은 신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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