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황성신문 | | 시골에서 태어난 죄밖에 없는데 우리나라 여인네들은 할일이 태산처럼 많다. 그 여인네들에는 어머니요, 할머니, 누나, 형수다. 나에게도 어머니, 누나, 형수님이 계신다. 1960년대에 시골의 여인네들이 한 일로 무엇이 있을까? 여인네들은 누에치고, 길쌈하고, 식구들을 위한 음식 만들고, 새참, 밭매기, 여러 가지 먹거리 만드는 것이 일반적으로 일상의 일이다.
삼밭을 가꾸고 삼〔大麻〕을 베어 오고, 삼굿하면 할일이 많이 생긴다. 삼 껍질 벗겨서 삼 째기를 해야 한다. 삼굿에서 싣고 온 삼은 잘 익어 있다. 김이 술술 나는 삼을 마당에 갖다 놓는 순간부터 너도나도 삼 껍질 벗긴다. 작은 동네, 적은 수의 사람들이라도 모두 우리 집으로 와서 인구밀도를 높이고, 삼 째기를 거들어 준다. 삼 째기를 하면 먹거리를 주기 때문에 작은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이게 된다. 삼 껍질 벗기는 날은 작은 동네 잔칫날이다. 물론 국수 삶아 새참도 낸다. 송계댁은 동네 사람들에게 먹거리 하나라도 더 만들어 내는 것을 좋아한다.
삼은 밭에서 자라, 삼굿을 갔다 와야 제 구실을 하게 된다. 삼 길이가 보통 1.5m로 어린 아이로서는 삼 껍질째기도 수월하지 않다. 키를 훌쩍 넘으니 어른들이 삼 째는 것보다 아이들은 두 배나 노력을 더 해야 겨우 따라갈까 말까한다. 삼 껍질을 벗기면 경주 사투리로 ‘재랍’이라는 새하얀 몸으로 나타난다. 이를 모아서 집짓기 할 때 사용한다. 재랍은 온통 몸의 벗김을 당하고도 저네들끼리 모아서 쌓아진다. 껍질 벗기 킨 재랍은 알싸하게 추워 보인다.
삼에서 껍질 받아 째기 하면 어른 손으로 한 묶음씩 밑동을 꽁꽁 묶어 둔다. 작업이 보기보다 수월하지가 않다. 한 묶음으로 묶인 삼은 헛간에 걸어 고이 말려둔다. 농사철에는 길쌈 일을 더 하지 못하므로 삼은 건조를 당하고 다음에 일을 기다린다.
여름철에 삼이 삼굿에 갔다가 껍질 벗기고, 건조시켰다가 긴 겨울 농한기 철이면 잡혀 나와 찬 도랑물에 들어가야 한다. 삼 껍질이 물에 들어가 제 몸을 불려 부드럽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작은 묶음으로 이른바 ‘삼가랑’이라 불리게 된다. 삼가랑은 겨울철 밤에 어머니, 누나, 형수가 오른쪽 허연 다리를 드러내게 만든다. 곧 삼 잇기에 들어간다. 이것을 ‘삼 삼기’라 한다.
겨울철에 삼을 삼는다. 농한기 밤에는 물론, 낮에도 삼 삼기를 한다. 겨울이라도 낮은 낮대로 할일이 생겨서 일하고, 기나긴 밤에 삼 삼기를 시어머니, 시누이와 함께 형수도 삼 삼기를 계속한다. 큰 방, 머리 방 사이 문까지 열어 제쳐두고 깜빡이는 호롱불 아래 삼 삼기 경쟁이 시작된다.
삼 삼기는 한 움큼씩 묶인 삼가랑으로 겨울동안 방안에서 일한다. 째 놓은 삼은 무딘 칼로 삼 밑동을 하얗게 되도록 토시어 둔다. 작은 움큼으로 삼 걸이에 걸어둔다. 한 올의 삼과 다른 올의 삼을 잘 이으려고 끝을 토신 것이다. 물론 연결하려고 곧잘 입에다 대고 끝을 찢는다. 한 올의 삼 들고 무릎 위에 놓고, 다른 올의 삼으로 하얗게 토신 것을 가지처럼 벌려 삼과 서로 연결해서 맨살 무릎 위에다 비벼대면 이어진다. 문제는 이런 동작이 무릎 위에서 계속 반복적으로 이루어진다. 어머니, 누나, 형수의 오른 쪽 무릎 위 뽀얀 살갗에 새카만 자연 때가 생겨 묻어있다. 하도 비벼 되니까 그 무릎인들 성할 수가 있겠는가? 여인네들의 무릎이 무슨 죄가 있다고 추운 겨울 긴긴 밤에 밤새도록 드러내놓고 앉아 비벼대야 한단 말인가? 비벼대는 오른쪽 무릎의 살갗이 붉다 못해 피가 뭉쳐져서 이제는 따가워 온다. 한국 여인네의 인고의 벌이다.
“게으른 며느리 삼가랑 수 헤아린다.”는 속담이 있다. 며느리는 시집와서 긴 겨울밤에 시어머니ㆍ시누이 앞에서 삼 삼는다. 가늘디가는 한 올의 삼을 삼는다. 그것을 주워 내어 계속 이어도 줄어들지 아니한다. 방 가운데에 잇지 않은 삼가랑 수만 수북이 남아 있을 뿐이다. 삼은 삼 보관바구니 역할을 하는 쳇바퀴에 차곡차곡 쌓이는데 시어머니는 삼 삼는 속도도 연륜으로 매우 빠르다. 금방 시집 온 며느리는 삼을 잘 삼지도 못하고 잠이 오고, 신혼의 신랑은 새 각시를 기다린다. 삼 삼는 것은 끝날 줄 모르고, 남은 삼가랑 수만 자꾸 헤아릴 수밖에 없다. 애꿎은 삼가랑 수만 헤아린다. 간혹 겨울 동치미를 국물 채 갖다 놓고 입을 축인다. 그런 군것질이라도 해야 긴 밤에 시간이라도 흐를 것이다.
삼은 삼아야 다음의 수순을 밟게 된다. 이으면 긴 타래로 바뀌어 표백제인 양잿물에 담가 삼에 붙은 껍질이 모두 벗겨지고 나서야 표백되면 하얀 실이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삼 삼기를 해야 한다. 삼베 짜기 위한 실을 만드는 작업이다.
삼 삼기는 게으른 며느리 삼가랑 수만 헤아리려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삼을 삼아야 실이 되기 때문이다. 실이 나와야 베를 짜고, 천이 되어야 옷감이 되기 때문이다. 삼 삼기는 어머니나 누나, 형수도 괴로운 일 중에 하나이다. 모든 것은 식구를 위한 여인네들이 해야 하는 작업인 것이다.
오늘도 밤새워 삼을 삼는다. 삼 삼는 여인네의 내어 놓은 허연 다리는 피가 나고, 때가 묻어도 참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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