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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인생공부, 서당공부 시작하다 | ⓒ 황성신문 | | 어려서부터 학교를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어렸을 때는 무엇을 배우려고 해도 가르쳐 주는 곳이 없다. 한 살 더 먹은 것은 자랑도 아니다. 죽지 않아서 호적을 한 해 지나고 보니 동장에게 부탁한 날이 관(官)의 호적에 따른 생일이 되고, 또 만 연령이 되는 기준이 된다.
다행인 것은 한 해 지출 거려서도 호적에 올랐다. 만 7세인 1957년에 초등학교를 가게 된 것은 당시의 개명(開明)된 결과이다. 초등학교 동기생들 중에 몇몇은 서너 댓살이 많은 사람이 더러 있었다. 호적이 늦게 되어서라도 관의 연령 기준에 맞게 입학한 사람이 당시에는 적었다. 연령이 되어도 초등학교에 넣지 않았다가 2∼3년이 지나서 겨우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한 것이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서당에 다니게 됐다. 서당(書堂)? 예전에, 민가에서 아이들을 모아 놓고 사사로이 한문을 가르치는 곳을 이르던 말인데 시골에서는 ‘어린이집’, ‘유치원’이라는 말도 없던 때다.
초등학교를 다니기 전에 서당을 일찍 간 것이 아니다. 집에 나이로 8세가 되어도 아무 것도 안 배우고 갱빈에 놀러나가고 방죽에 수양버들 기어오르기만 했다. 서당이라는 것도 모르고 여덟 살이 되고 말았다. 갑자기 어느 날 공부해야 한다는 아버지 철학이 확립(?)되어서 우리 동네 제일 뒷집에 서당을 운영하고 있다. 봄날 서당에 가자고 해서 빈손으로 짚신신고 아버지 따라나섰다. 훈장께 인사하고 통성명을 시킨다.
“네 이름이 무엇인고?”
“예. 저는 차성(車城)이가 40세(世)로 이름은 ‘헤엄칠 영(泳)자’에 ‘맏이 백(伯)자’입니다.”
“고놈 참, 똘똘 타. 그래 ‘헤엄칠 영’자는 ‘담방구질 할 영’자라고 하지.”
어째 그때 들은 바대로라면 뒤로 발라당 나자빠질 뻔했다. ‘헤엄칠 영’자를 ‘담방구질 할 영’자라고 했다.
“그래 내일부터 천자문을 배운다. 한문(=천자문)책 준비하고, 붓, 먹, 종이를 가지고 오너라.”
“예.”
향촌 동네서당 간판이 ‘물봉(勿峯)서당’이라는 곳에 입학한다. 아버지는 서당에만 들어가면 오늘 날의 어린이집 위에 유치원에 다닌 것쯤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미 아버지는 장날 난전(亂廛)에서 석봉(石峯) 한 호(韓濩)의 ‘천자문(千字文)’ 책 한 권을 사다 두었다. 막내아들을 계획적으로 서당에 다니게 하려는 것이다. 벼루는 집에 제사 때마다 큰형이 사용하던 커다란 무거운 돌벼루이었다. 붓·종이하며 아버지는 “서당에 다닐 일습물품을 모두 준비해 다니라”고 명령한다.
아버지 교육철학은 큰형이 나와 스물네 살 차이로 큰형이 돌아가면 집안에 대소사 글 쓰는 일을 맡아 처리하라고 서당에 다니라는 교육철학이다. 그래야만 남의 집에 글 빌리러 가는 것만 면하면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큰형은 일제강점기 시대에 늦은 나이(16세)까지 서당에 다니다가 간이학교에 2년간 공부했다. 그때 시골에 살면서 한시(漢詩) 짓고, 일본어 회화까지 하도록 실력을 갖추었다. 현대교육은 해방이 되고, 이어 6·25전쟁을 겪고 겨우 자리를 잡게 된다. 이런 터에 아버지는 앞으로 발전될 시대적 인지감각을 읽지 못한다. 필부필녀(匹夫匹女)나 장삼이사(張三李四)로 자식을 키우려고만 한다.
아버지 교육철학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되지 못할 바에야 그저 시골에서 농사짓고, 장가가서 아들․딸 푹푹 많이 낳고 조상의 대를 이어 살면 된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이 왜 그리 깊이 박혔느냐하면 물론 아버지 1899년(근세조선 고종 광무 3년)생으로서 일자무학이다. 근대 조선시대 말,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해방(解放), 6·25전쟁, 현대 민주주의 초기시대까지를 거쳐 온 것이다. 농촌에서 오로지 먹고, 입고 사는 것에 연연하다 보니 달리 사회개명에 대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아버지로서는 이것이 당시에 최상의 교육 방법인 줄 알았던 것뿐이다. 게다가 아버지는 같은 고장에 천석꾼 재종(再從)인 부잣집에 마름을 했다. 현대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면서 허랑방탕한 재종숙이 현대화 학문(일제침략기 시대에 5년제 중학교)을 한 사람으로 그렇게 재산을 탕진하니 신학문을 좋아할 리 없다. 구학문(=서당공부)으로 그저 “가정사 관리만 하고 살면 된다.”라는 뜻이 깊이 철학으로 박히게 됐다.
이튿날부터 천자문을 배웠다.
“하늘 천!”
“하늘 천!”
“따지!”
“따지!”
평생에 두고 이 ‘천지현황(天地玄黃)’ 네 글자만 알고 살아도 모든 것을 다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겨우 시골나이 8살, 호적나이 6살에 내가 세상을 알면 얼마나 알고, 또 모르면 얼마나 모를 것인가? 천자문 첫날 첫 페이지부터 세상을 다 안다니 황당하고 기가 찼다.
한자 낱글자를 배운 후에 넉 자를 함께 대구(對句)로 해석하는데 “하늘과 땅은 검고도 누르다. 알겠느냐?”고 그랬다. 서당훈장님이 “알겠느냐?”고 하면 그저 그때는 “예.”라고 대답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회초리를 맞아야 하는 것이다. 어릴 때 훈장 옆에 둔 그 회초리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놈 중에 하나이다.
지금 같았으면 “하늘이 왜 검어요? 파랗지”했을 텐데 그 때는 그저 그 회초리가 무서워 말도 못하고 막연히 그냥 “예”라는 말 밖에 안 나왔다. 우리나라 석학 이 어령(李御寧, 1933년 12월 29일~ ) 씨는 “하늘이 파랗지? 왜 검느냐?”고 대꾸하다가 서당의 바깥에 쫓겨났다고 방송에서 말씀한다. 왜 땅이 누렇지? 그냥 흙색이지! 그런 것을 따지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초등학교 들기 전까지 천자문 ‘지킬 수(守, 250/1,000자)’자까지 1/4만 배우다가 말았다. 신학문인 초등학교를 195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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