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황성신문 |
|  | | ⓒ 황성신문 | | “지금 몇 시에요?(What time is it now?)”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를 입학하지 못했다. 그래서 신학문을 싫어하는 아버지 몰래 용돈 모아 강의록을 구입해 나 혼자 영어를 배울 때 ‘It의 특별 용법’을 배웠던 문장이 생각났다.
1950년 이후부터 살아오는 동안 시골에서는 시간을 알 수가 없었다. 시골에서 시계를, 그것도 손목시계를 차고 있다는 것은 그땐 대단한 부자로 쳤다. 집에 기둥시계 하나 없던 시절이다. 기둥시계라는 말도 초등학교 들어가서 알았다. 그런 말이 있는지조차 처음으로 알고 살았다.
집에서 시간을 알려면 새벽 첫 기차가 네 시에 부산을 향해 동해남부선 불국사기차역을 지나 갈 때였다. 윗동네에 교회 두 개가 있는데 새벽 네 시가 되면 종소리를 울렸다. 양 교회에서 종소리가 다르게 서로 경쟁하듯이 울려 퍼졌다. “뎅~땡, 뎅~ 땡!” 그러나 그 종소리도 새벽 네 시에 깨기 때문에 들었다.
왜 새벽 네 시에 기차나 교회종소리를 아느냐고 하면 우리 집에만 있는 특이한 방법으로 아버지가 가정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철저한 경제주의자다. 저녁 일곱 시까지만 집안에 불을 켤 수가 있고, 특별한 일(고공공예 제작 등)을 하지 않는 이상 불을 켤 수가 없다. 일하지 아니하고 불만 훤히 밝히면 경제가 손해된다고 했다. 새벽 네 시만 되면 사랑채에서 불씨로 호롱에 불 밝히고, 가족 모두를 깨웠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 네 시면 아직 날이 덜 새서 어둠 침침하는 데 모두 깨워 버린다. 그때부터 할일을 생기게 만든다. 앞 도랑물의 자연수를 퍼서 세수한다. 남자들은 개똥호미와 망태를 메고, 개똥 주우러 나가야 한다. 한 망태를 주어 오지 못하면 아침밥을 안 준다니 어렵게라도 주워 와야 했다. 새벽녘에 내가 사는 동네를 먼저 한 바퀴 돌아보도록 했다. 그렇게 일찍 일어나니 건강에는 물론 좋았다. 아침밥이 아주 맛있다.
시골에서는 약속을 하더라도 대충 시간을 맞추는 것이다. 정확히 몇 시 몇 분에 만나자고 못한다. 오전 참 때 시간은 열 시경, 정오는 낮 열두 시, 점심때는 한 시경, 오후 참 때는 네 시경, 저녁때는 일곱 시경, 잠잘 때는 여덟 시경으로 통했다. 잠 깰 때는 새벽 네 시다. 수면시간은 꼭 여덟 시간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다. 대충시간이 이렇게 알기도 하고, 통하던 시대다.
아버지 일상은 새벽 네 시에 깨어나서 집안의 허드렛일과 그날의 계획을 짠다. 쇠죽을 끓여 두고, 아침 다섯 시만 되면 짝(나무)가래를 들고 논으로 나간다. 논들 한 바퀴 돌고 들어와서 아침밥을 일곱 시에 먹는다. 다시 일곱 시 반쯤에 논벌로 나간다. 열 시에 새참, 또 오전 세 시간 일하고 오후 한 시에 점심, 다시 네 시에 새참, 일곱 시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는다.
조금 떨어진 소도시 지서(오늘날 지구대)에서 시간을 알려 준다. 시계가 없던 시절에 온 동네에 알려 주는 이 소리로 시간을 기준 삼는다. 바로 ‘오포(午砲)’라고 한다. 닭 울음소리로 하루를 시작했던 우리가 근대적 대중 시간개념을 처음 접한 것은 정오(正午)에 맞춰 대포를 쏜 ‘오포’소리가 나고 이후부터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오포는 인천에서 시작된다. 1887년 10월 일본인들이 인천항에 정박하는 자국의 군함에서 매주 토요일 낮 열두 시에 맞춰 공포(空砲) 한 발씩 쏴 줄 것을 일본해군성에 요청했다. 이 함포는 발사 시각이 부정확하고, 소리 전달에 한계가 있어 곧 중단되고 말았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오포를 공식화했고, 이후 서울, 부산, 목포, 평양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실시했다. 일제침략기 시대인 1912년 1월 10일부터 조선의 표준시를 일본 동경에 맞추기 위해 오전 11시 30분에 오포를 쏘았다. 우리의 시간마저 식민통치한 것이다.
손으로 줄을 당겨 폭발시키는 구식 대포를 사용했기 때문에 비 오는 날이나 습한 때는 황이 잘 터지지 않아 1, 2분가량 늦는 게 다반사이었다. 게다가 그 울림으로 인한 소음과 오발로 가옥파손 등으로 인근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포수는 요즘으로 말하면 예비역인 재향군인들인데, 1925년에 오포제는 폐지됐다. 대신에 1931년 7월 1일부터 서울 홍예문 위에 세워진 소방대 망루에서 시보(時報)사이렌이 울렸다. 이 사이렌은 1960년 대 초까지 운영됐다.
19세기 유럽에서 별나게 소리가 뛰어나는 악기를 만들어 사이렌이라 이름을 붙였다. 이 소리를 뱃길의 안내신호나 자동차의 경적에 이용하면서 경계하고, 경계하는 소리를 사이렌이라 일컫게 됐다. 일제침략기 때 이 사이렌소리 울리는 것을 ‘오포를 쏜다.’고 변이해 사용했다.
고향에서는 지서 높은 망대 위에 사이렌이 정오가 되면 울었다. 정전이라도 되면 사람이 망대까지 올라가 아날로그 식인 맨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냅다 돌리기도 했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듣고 “오포 분다.”고 표현했다. 불이라도 나면 시도 때도 없이 파열음을 내고, 울어서 놀라기도 했다. 통금시각을 알리느라 자정에 두 번, 해제한다고 새벽 네 시에 한 번 울리기도 했다.
시골에 오포가 곧 사이렌 소리이지만, 그때 시간을 알려 준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인간들이 사는 곳에 시간을 오포로 알려 주어 기준이 마련됐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