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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향 천 리 문향 만 리”- 이영백 수필가
천수답의 물대기(1)
황성신문 기자 / 입력 : 2022년 04월 08일(금) 15:52

ⓒ 황성신문
↑↑ 묘답 다섯 마지기 천수답의 물대기
ⓒ 황성신문

어릴 적 온갖 심부름 다 해 보았고, 어려운 일 다 했다. 한밤 캄캄한 밤에 겨우 집에 나이 아홉 살, 학교 나이 일곱 살 초교 1학년짜리 아이에게 혼자 들판에 가서 논물 대라고 하는 것은 무리다. 그리고 지키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은 정말 수행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명령은 명령이다. 군소리를 못하고 물대러 나가야한다.
우리 집에는 논이 조금 많았다. 거개가 천수답(天水畓)이거나 저수지가 없는데서 농사를 짓는 논이었다. 논이 경지정리가 되지 못하고, 자기모양 생긴 대로 따라 도랑들이 구불구불하듯 논둑이 제 멋대로 있던 그런 시대의 들판이다.
논은 있는데 밤에 물을 대야 하는 논이 많다. 천수답이다. 어렵게 모내기를 한 논에 이튿날 뜨겁고 붉은 태양이 떠오르면 논이 마르기 시작한다. 논에 댈 물은 모자라고 낮에는 아예 물 구경을 할 수가 없다. 논에 물이 있어야 심어 놓은 모가 자랄 수 있다. 밤에 우리 식구들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산지사방으로 책임지고 논마다 물대러 나가는 것이 그 때는 가장 큰 일이다.
내가 제일 어리다고 가까운 새보 묘답 다섯 마지기에 물대러 가라 한다. 그것도 많이 생각하여 준 명령이다. 밤은 무섭다. 물대러 가려면 준비물이 필요하다. 길을 밝히는 등, 성냥통과 삽을 가지고 가야 한다. 플래시도 없던 시절이다.
등은 사각 틀을 만들고 불 켜면 검댕이 빠져 나가도록 위에다가 둥근 구멍을 만들어 두었다. 아래는 나무가 막혀서 호롱을 놓도록 만들어졌다. 등 사방에 참 종이를 발라두고 한 쪽은 불 켜기 위해서 문짝처럼 위쪽에다 고정시켜 여닫이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생긴 등에 호롱불 켜서 들고 가야 길이 밝아진다. 들고 다니도록 위에다가 끈을 달고 막대기까지 묶어 놓았다.
논에 물대러 나가는데 단단히 준비하고 가야 한다. 준비물을 들고 논 새보도랑 쪽 높은 둔덕에다 자리 정하고 등불 거야 한다. 캄캄한 길에 삽만 챙겨 들고 역 밑으로 도랑 따라 올라간다. 논에 물꼬를 틔어서 물대고 들어가면서 불보고 따라 오기 때문에 어두워도 불 끄고 다녀야 한다. 물을 어디서 막아 대는지 도랑 따라 찾아 올라가 보아야 하였다.
동해남부선 불국사기차역에서 항시 켜놓은 역의 가로등이 희미하게나마 가는 길을 밝혀 주고 있다. 더듬거리고 찾아 올라가니 용케 멀리 가지 않아도 되는 거리이다. 삽으로 막아 놓은 도랑물을 터뜨리면 우리 논으로 들어오는 도랑 따라 부리나케 내려와야 한다. 천천히 따라 오는 물줄기 소리가 아직 나지 않고, 우리 논 물꼬 앞에서 도랑을 텄다. 살짝살짝 가볍게 아까 등을 놓아 둔 언덕으로 와서 가만히 물 내려오기 기다렸다. 천천히 왔기에 도랑에 물줄기가 벌써 따라 와서 우리 논바닥으로 들어오고 있다.
역 밑 우리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천지가 새카맸다. 어떻게 보면 가장 자연스럽게 살고 있는 전형적인 자연인 농촌마을이다. 천지가 새카만 들판의 둔덕에 앉아있기도 무섭고 그만 드러누웠다. 밤하늘의 그 무수한 잔별이 떠있다.
하늘도 하도 맑아서 별이란 별은 온통 내 눈 안으로 모두 쏟아져 내린다. 은하수가 가로질러 칠월칠석 견우·직녀가 만날 다리도 보인다. 가장 북쪽에 우뚝 보이는 북두칠성 1등 별들이 제 자랑을 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밝은 별, 자기를 보라고 말하듯 붙박이별로 떠 있다.
또 등불이 어른거려 보였다. 아까 내가 터뜨리고 내려왔던 그 물꼬의 논 주인이 자기 논에 물이 들어가는 것을 다시 확인하러 왔던 모양이다. 그 새 물꼬를 막은 흙을 터뜨리고 자기 논에 또 물을 댄다. 이때는 불도 켜지 않고 캄캄하게 가만히 기다렸다가 그 사람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확인 후 물을 대는 것이 상책이다.
<다음호에 계속>

황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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