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차성(車城)의 편린 | ⓒ 황성신문 | |
 |  | | ⓒ 황성신문 | 민초는 흐르는 물 따라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수면 위로도, 수면 밑 모래바닥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뿐이다. 가문의 뿌리는 멀리 있다. 조상으로부터 받은 ‘차성(車城)’이 본관이다. 흔한 성(姓)임에도 불구하고 희본이다. 초교 3학년 때 아버지 손잡고 월이 시조탄강지를 찾아갔다. 비조(鼻祖)가 태어난 곳을 ‘광림대(光臨臺)’라 하였다.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사람으로 태어난 곳이다. 어린 날에는 그런 것이 참 이상하였다.
월성이씨와 나는 그들의 본관과는 다르다. 분적종 차성이가이다. 누가 정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정했기에 본관이 된 것이다. 왜 이렇게 정하여진 것을 아무도 몰라서 본관 찾아 나의 평생을 허비하였는가.
기장읍지(邑誌)를 구하였다. 고조선 이래 삼한(三韓)시대 72국 소국 중에 ‘거칠산국(居漆山國)’이 있다. 그곳 첫 지명이 ‘갑화양곡(甲火良谷)’이다. 신라 22대 지증왕 6년(505) 갑화양곡현(縣)이 되었다가 35대 경덕왕 16년(757)에 현대 지명화하면서 일명(一名) 차성 혹은 기장(機張)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고려 현종 9년(1018)에 ‘별호(別號) 차성’이라 하였다. 현재 기장군에서는 별호 ‘차성’을 공식 인정한다. 그러나 신라 말 이전부터 차성이란 지명을 사용하였다. 우리 본관 명칭이 그 산 증거이다.
기장읍지. 하나, 동국여지승람본(성종시 盧思愼 등, 신증동국여지승람-중종시 李荇 등)에 군명(郡名)으로 ‘갑화양곡ㆍ차성’이 나온다. 둘, 장유풍본(1855년)에 군명은 같다. ‘임란 후 본현 향안유안’에 ‘이성은(李聖殷) 본 차성 원동(院洞)’이 나온다. 셋, 이해륜본(1899)에 군명은 같다. 부록에는 ‘정본 차성가(車城歌)’가 붙여있다. 「국문학사전」에는 철종11년(1860)에 지어진 풍정가사라고 한다. 넷, 己未본(1979)에 35대 경덕왕16년(757)에 기장으로 고치면서 ‘일명 차성’이라고 부기하였다.
최근에 차성이라는 한자 지명이 외국 어디에 존재하는가를 조사한 결과 중국에는 없다. 다만 대만(臺灣)에서 고웅(高雄)시 동평현(東平縣) ‘차성향(車城鄕)’이 나와 있다. 이러한 연관으로 우리 본관의 연유를 더듬어 또 나머지 일생동안 나 혼자라도 찾아 보아야할 것 같다.
꼬불꼬불한 도랑물이 산골짜기에서부터 모아져 시냇물 이루어 민초들의 삶터인 향촌(鄕村)을 이룬다. 차성이씨 후손들이여 다시 기다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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