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황성신문 | |  | | ↑↑ 차성이씨 시조 휘위 관련 | ⓒ 황성신문 | | 강에 발원지가 있듯 인간에도 뿌리가 있다. 차성이씨는 삼한시대 “갑화양곡(甲火良谷)”지명에서 “현(縣)”이 되었고, 신라에 통합되면서 35대 경덕왕 757년네 현대 지명화 개칭으로 「일명 차성(車城), 군명 기장(機張)」이 되었다.
차성지명은 대만의 고웅시 동평현 차성향(鄕)에서 왔는지 의문이 생긴다. 신라시대 지명에 사연 없는 것이 없다. 추측컨대 “갑화양곡”이후 지명으로 오랫동안 차성과 혼용한 것이다. 그러기에 신라에서는 그 흔적을 남기고자 일명으로 부기한 것 같다. 1,200년 전 지명을 잘 모르고 살 뿐이다.
“차성”본관을 득한 흔적은 오늘날에 뚜렷이 고증적 문헌자료가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평생 이곳의 지명을 끄집어내어 연구하게 된 것은 이미 본관을 우리족속이 가지고 있는 그것이 바로 실증증명이라 할 것이다.
차성이씨대동보에는 “李嗣彦月城李氏始祖楊山村長諱謁平三十二世也字重仁有文章新羅僖康王元年及第以中書舍人爲金明所害人皆痛之神武王卽位初公與崔文昌爲及第眞翰林院學士左諫議大夫命爲太子師傅以翰林之壬一時遊歸皆師至門下侍中太史令銀靑光祿大夫復令樂預政事諡文義公松溪先生有子長子岐繼代月城李氏次子渭得貫車城李氏始祖且慶事月城李氏首分籍宗也”라 밝혔다.
차성이씨 시조 “이위(李渭)는 字涇之號釣隱文武智勇新羅憲安王元年武科及第年十八與父中書舍人爲金明所害人皆痛之一時留車城縣仍居賜景文王十四年國亂平定功臣封車城君官之城主將軍錄尙書事年老退去臨海間學士徒衆勸學訓導植樹木養魚放海得號釣隱及卒神德王朝四年上遣禮官致祭命名車城君陵陵在車城縣萬化後山子坐原贈高麗成宗朝二年工曹典書後壁上功臣輔國上大將軍諡忠肅公爾後月城李氏始祖楊山村長諱謁平三十二世諱嗣彦次子三十三世諱渭分籍本貫車城得貫車城李氏始祖也配貞敬夫人月城金氏新羅文聖王貞兩公女墓在歃良州郡古村北嶝艮坐”라 하였다.
2世 환(桓), 3世 오연(䫨然), 4世 승(塍), 5世 용(鏞), 6世 원준(願浚), 7世 주호(柱顥), 8世 강영(顜煐), 9世 진(鎭), 10世 시발(時發), 11世 수경(守敬), 12世 준기(睃棋), 13世 교태(敎退), 14世 정언(晶彦), 15世 재인(在荵), 16世 대근(大根), 17世 민윤(玟允), 18世 희태(熙泰), 19世 진(眞), 20世 종보(從俌), 21世 정억(廷億), 22世 원주(元周)….
나 40世 청림은 이 한 장의 원고를 만들기 위해 평생 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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