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가장존 공인중개사 사무소 대표
행정학박사 윤 해 수 | ⓒ 황성신문 |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20-1번지 황룡사지(皇龍寺址)에 있었던 황룡사(皇龍寺)가 창건된 것은 신라 진흥왕 14년(553), 반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지으려고 준비하는 중 황룡(皇龍)이 나타나므로 궁궐 대신 절을 지어 황룡사(皇龍寺)라고 했다고 한다. 진흥왕 35년(574)에 이르러 본존불인 금동장륙상(金銅丈六像)이 완성되었으며 진평왕 6년(584)에는 인도에서 건너온 철과 금으로 만든 5m 높이의 거대한 삼존불상(三尊佛像)을 모시기 위해 금당(金堂)을 지었다. 원래 황룡사(皇龍寺)는 가섭부처님 신앙지이다. 그래서 가섭부처님이 참선하셨던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이 있었다. 아마 3개의 전각엔 가섭부처님, 석가모니부처님, 미륵부처님을 모셨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후 선덕여왕 12년(643) 때 자장율사의 권유에 의해서 높이 80미터의 9층 목탑(木塔)을 만들어 세우게 되었다. 그래서 황룡사(皇龍寺)는 4대 왕에 걸쳐 93년이라는 긴 세월을 소요하면서 완공된 대사찰(大寺刹)이었는데 1대 주지는 환희스님이고 2대 주지는 자장율사였다.
솔거가 그렸다는 새가 앉다가 떨어졌다는 이 절의 소나무 벽화(壁畫)가 유명하며, 삼국유사에 신라 35대 경덕왕 13년(754)에 무게가 49만 7,581근인 황룡사(皇龍寺)의 종을 주조(鑄造) 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성덕대왕신종보다도 무려 4배나 크고 17년이나 앞서 만들었다.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골군의 침입으로 가람 전체가 불타버렸으며 목탑(木塔)과 함께 소실(燒失) 되어 폐사지(廢寺址)로 터만 남아있다.
1976년부터 실시된 발굴조사를 통해 목탑 규모(木塔規模)는 한 변의 길이가 22미터인 정방형의 형태로 총면적은 490㎡다. 기단(基壇)에는 1개의 심초석과 64개의 초석(礎石)이 정면 7칸, 측면 7칸으로 구성돼 있다. 심초석(心礎石)은 435㎝×300㎝의 크기이며 두께는 128㎝에 이르는 화강암으로 무게는 30Ton에 달한다. 심초석(心礎石) 안에 마련된 사리공(舍利孔)은 외곽에 두 줄의 홈을 돌려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했으며 그 안에 금동사리(金銅舍利) 내함(內函)과 외함(外函)이 발견됐다.
발굴 과정에서 자궁(紫宮)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기와 조각이 나왔다. 자궁(紫宮)은 황실(皇室)을 의미한다. 황룡사(皇龍寺)는 누를 황(黃)과 황제 황(皇)을 같이 사용한다.
조선 시대에 저술된 동경잡기에는 “오직 장륙상(丈六像)만이 남아 있다”라고 하였으나 어디에고 흔적(痕迹)조차도 없다.
황룡사지(皇龍寺址) 일대를 구황동(九黃洞)이라 한다. 황룡사(皇龍寺), 황복사(皇福寺), 황성사(皇聖寺), 분황사(皇龍寺) 등 황(黃) 자가 들어가는 절이 9개나 있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옛날에 황룡사(皇龍寺)가 있었던 곳이라고 하여 구황동(舊黃洞)이라고도 한단다.
구황동(舊黃洞)에서 어린 때를 보낸 재 캐나다교포 김천수(김문종)라는 사람이 너무 가난하여 주로 분황사(芬皇寺)에서 밥을 얻어 먹었기에 부처님께 보은(報恩) 하는 길은 사찰(寺刹)을 짓는 일이라고 평소에 늘 생각을 해 왔었다고 한다.
어린 날 보아두었던 황용 골짜기의 폐탑(廢塔)이 있는 산 전부를 매입(買入)해 달라고 형님에게 부탁했는데 경주시 황용동 산 170-4번지, 서탑지의 일부인 682㎡ 정도만 분할, 매입(買入) 하여서 형님이 원망스럽다고도 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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