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가장존 공인중개사 사무소 대표
행정학박사 윤 해 수 | ⓒ 황성신문 | -지난호에 이어
몽고가 침입하여 황룡사(皇龍寺)에 불을 질렀는데 석 달 열흘이나 불길이 치솟았다고 한다. 황룡사(皇龍寺)가 호국신앙(護國信仰)의 중심 사찰(寺刹)이었기에 몽고군이 스님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있던 스님들이 아주 깊은 산골짜기로 숨어들어 절을 지었는데 옛날에 살던 절의 이름을 그대로 본떠서 황룡사(皇龍寺)라고 하였으며 사람들이 황룡사(皇龍寺)가 있는 골짜기라고 하여 황용(皇龍)골짜기 혹은 황용동(皇龍洞)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경주시 구황동 320-1번지, 일대를 옛날에 황룡사(皇龍寺)가 있었다고 하여 구황룡(舊黃龍), 혹은 구황동(舊黃洞) 이라고 했다는 말을 어린 날 분황사(皇龍寺)의 어느 노스님에게 종종(種種) 들었다고 했다.
이 황용(黃龍) 골짜기도 여러 가지 설(說)이 있다. 1740년의 불국사고금역대기(佛國寺古今歷代記)에서 신라 선덕여왕대에 약사상을 안치하고 황둔사(黃芚寺)라고 했다는 기록과 1623년 조선 인조원년 담화스님이 왜군에 의해 불에 탄 황용사(皇龍寺)를 중창했다는 내용이 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신라(新羅) 30代 문무왕(文武王)이 동해에 왜구(倭寇)가 침입하여 혼란스럽게 하는 것을 보고 탄식하며 귀로(歸路)에 토함산(吐含山) 중턱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산천을 두루 살펴보니 단풍이 황색(黃色)으로 물든 절경이 너무 아름답고 산마루가 용(龍)의 머리같이 생겼다 하여 즉석(卽席)에서 황용(黃龍)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2018년부터 경주시 황용동 산 170-4번지 일대 황룡사지(黃龍寺址)를 3년간 조사 중인 불교문화재연구소(佛敎文化財硏究所)는 “회랑(回廊), 건물지(建物址), 석축(石築), 석렬(石列), 진입부 등 다양한 문화재(文化財)가 출토됐다”고 밝혔다. 그리고 “투조(透彫) 금동귀면(金銅鬼面)과 금동보당(金銅寶幢), 당간(幢竿), 기단(基壇), 금동불상(金銅佛像) 대의편(대좌 위에 흘러내린 옷주름 조각), 금동사자상(金銅獅子像), 금동연봉, 금동촉대 받침 등 금동제(金銅製) 유물 20여 점20여 점도 확인됐다”고 한다. 이번 조사에서 새롭게 확인된 금동보당(金銅寶幢)의 당간(幢竿)과 기단부는 지금까지 확인된 바 없는 최초의 발굴이어서 학계의 관심이 큰데 지금까지 국내에서 출토된 것 중 가장 큰 보당(寶幢)이란다.
불교문화재연구소(佛敎文化財硏究所) 최인창 조사팀장은 경주 시내에 조성된 국찰(國刹)과 비교하면 촌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보잘 것 없는 절터이어서 “폐사지(廢寺址)의 비지정문화재(非指定文化財)를 그냥 조사하는 차원에서의 단순한 발굴이었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황룡사(黃龍寺)가 경주지역 내 주요 사찰과 비교될 수 있을 정도로 수준이 높은 유물들이 많이 나왔다.”라며 “황룡사(黃龍寺)가 생각보다 격조가 매우 높은 절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한다. 또한 불교문화재연구소(佛敎文化財硏究所) 이영환 연구사는 고려시대에 황룡사(구황동)가 폐사(廢寺)가 되었으니 그 이후에 격에 맞는 황룡사(皇龍寺)가 되지 않았나 추정된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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