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가장존 공인중개사 사무소 대표
행정학박사 윤 해 수 | ⓒ 황성신문 |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243번지 일대 사적 제340호로 지정되어 있는 천관사지(天官寺址)는 경주 오릉(사적 제172호) 동쪽 들판에 있으며 반월성과도 남천을 사이에 두고 동남쪽 500여 m의 거리에 떨어져 있다. 김유신 생가 터인 재매정(사적 제246호)과도 남쪽 방향의 직선거리로 400여 m 정도 떨어진 지척(咫尺)에 위치하고 있다. 도당산은 남산의 북쪽 끝에 있는 자라의 머리에 해당하는 명당(明堂)으로 신라 건국 초기부터 화백회의(和白會議)와 도당(都堂)이 열렸고 국신(國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성스러운 곳이었다. 왕이 즉위(卽位)하면 이곳에 먼저 올라가 의례(儀禮)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의 국가적 중대사(重大事)들이 도당산에서 결정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반월성(半月城)에서 남쪽으로 약 1Km 거리에 있는 나정(蘿井)은 박혁거세를 기리는 유허비(遺墟碑)를 비롯하여 신궁터로 추정되는 팔각건물지, 우물지, 담장지, 부속건물지 등이 발굴 결과 확인되었다. 그래서 왕실의 조상묘와 신궁이 있어서 왕이 제례(祭禮)를 지내던 곳이라 추정(推定)하고 있다.
도당산 아래 기슭에 있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샘(泉)이 있다는 천원(泉源)마을의 가운데에 있는 천관사(天官寺)는 통일신라 때 김유신과 인연이 있었던 기생(妓生) 천관(賤官)을 위해 세웠다고 전해지는 사찰(寺刹)이다. 17세인 청년 시절에 김유신은 천관(賤官)이라는 기생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안 어머니 만명부인(萬明夫人)이 완강하게 만류(挽留)하며 꾸짖었다. 그래서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는데 어느 날 술에 취해 깜빡 말을 탄 채 잠이 들어버렸으므로 아끼고 사랑하던 말이 의례적으로 가던 천관(賤官)의 집 앞으로 가고 말았다. 유신은 칼을 빼들고 내려쳐서 애마(愛馬, 말)의 목을 베어버렸고 냉정하게 천관(賤官)을 뿌리치고는 말의 안장도 버린 채 돌아왔다. 이를 슬퍼하고 비관한 천관(賤官)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 후에 유신은 천관(賤官)이 살던 집에 천관사(賤官寺)를 지어 그녀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신라 제26대(재위 579∼632) 진평왕 시대 천관사지(賤官寺址)는 김유신과 천관녀(賤官女)에 얽힌 창건설화(創建說話)로 인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사찰(寺刹)이지만 대중들에게 각인된 창건설화(創建說話)는 역사서에 수록된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 문인 이인로(李仁老, 1152~1220)가 편찬한 시화집인 ‘파한집(破閑集)’에 수록된 것이다.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구형왕)으로 신라에 투항(投降)하고 진골귀족(眞骨貴族)으로 편입하여 경주로 이주(移住)하여 살았다. 진평왕 17년(595)에 만노군(신라 때 진천군의 이름) 태수(太守)를 역임한 김서현이가 아버지이며 신라 제23대 법흥왕의 동생이며, 제24대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손녀 만명부인(萬明夫人)이 어머니이다.
2000년부터 국립 경주문화재연구소(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와 신라문화유산연구원(新羅文化遺産硏究院)에서 발굴조사했는데 석탑 기단부와 건물지 여러 동과 우물, 탑지(塔址)와 석등지와 함께 천관사(天官寺)라는 명문(明文) 기와가 발견되었다. 발굴하기 이전에 우리는 천할천(賤)자를 써서 기생인 천관녀(賤官女)로 배웠고 그렇게 알았는데 천관사(天官寺)라는 명문(明文) 기와 조각이 발견된 후부터 하늘천(天), 천관녀(天官女)라고 바꿔서 쓰고 있다.
천관사(天官寺)는 김유신이 사랑하던 기생(妓生) 천관 (天官)의 집을 절로 바꾼 곳이라 한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보자! 과연 천관녀(天官女)가 술을 팔면서 음방(淫坊)을 운영하는 창기(娼妓)였을까?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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