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가장존 공인중개사 사무소 대표
행정학박사 윤 해 수 | ⓒ 황성신문 | 남편이 사망 후에 수절(守節)하거나 위난(危難)시 죽음으로 정절을 지킨 여성을 열녀(烈女) 또는 열부(烈婦)라고 하는데 유교에서는 충(忠), 효(孝)와 열(烈)이 으뜸이라 했다. 충(忠)은 임금이나 국가에 충직함이고 효(孝)는 자식이 부모를 열(烈)은 아내가 남편을 잘 섬기는 것이다. 고려 말까지는 남편이 죽고 수절(守節)한 여인은 무조건 열녀(烈女)로서의 표상(表象)으로 국왕이 표창(表彰)하였는데 이는 그때까지만 해도 재혼(再婚)하는 것은 보편화된 일 이였을 것 같다.
고대 사서(史書)에서는 도미(都彌)의 아내, 박제상의 아내, 평강공주 등을 대표적인 열녀(烈女)로 꼽는다.
박제상은 신라시대 대표적인 우국충절(憂國忠節) 열사였다. 박제상은 신라 내물왕 때부터 눌지왕 때까지 활동했으나 생(生)과 몰(歿)은 알 수가 없다. 영해 박 씨의 시조로 삼국사기에는 혁거세의 후손이고 제5대 파사왕의 5세손이며 할아버지는 아도갈문왕, 아버지는 파진찬 물품(4번째 관등)의 아들이라고 하나 삼국유사를 보면 김제상이라 되어 있다. 아무튼 똑똑하고 지혜롭고 책임감이 유별나서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어린 때 아버지와 함께 궁중(宮中)의 잔치에 참여한 일이 있었는데 재주와 재치(才致)에 놀란 왕이 궁중(宮中)에서 잔심부름을 하게 했으며 일 처리 능력(能力)이 남다르게 뛰어났다.
내물왕과 실성왕 때는 국력이 약하여 왜구(倭寇)들이 자주 동해안을 침략해서 약탈(掠奪)해 가므로 실성왕은 박제상이가 지혜로울 뿐 아니라 무위(武威)까지 특출(特出)해 왜구(倭寇)들의 침략으로 피해가 큰 율포(栗浦)로 보내 지키라고 했다. 박제상은 단신(單身)으로 율포(栗浦)로 내려가 왜구(倭寇)들을 물리치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눌지왕이 즉위하여 고구려와 왜(倭)에 볼모로 억류(抑留)된 동생들을 구해 올 대책을 강구했다. 눌지왕 원년(元年)에 왕의 간곡한 부탁으로 고구려에서 왕의 동생 보해(寶海)를 구출(救出)한 후 집에도 들르지 않고 또 왕의 다른 아우 미사흔(미해)을 구하기 위해 바로 왜(倭)로 출발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아내는 허겁지겁 율포(栗浦)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그러나 배는 이미 왜국(倭國)을 향해 미끄러지듯 떠나가 버렸기 때문에 만나지 못했다.
왜국(倭國)에 간 박제상은 기지(機智)로 왕자인 마사흔(미해)을 구했으나 왜병(倭兵)에 붙잡혔다. 충절(忠節)과 지혜가 있는 박제상에게 왜국(倭國)의 왕이 부하가 되어 달라고 간청했다. 신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倭國)의 신하는 될 수 없다며 항변(抗辯)한 박제상을 온갖 회유(懷柔)와 협박(脅迫)을 다 해서 설득(說得)하다 못해 화형(火刑)을 시켜버렸다. 삼국사기는 왜왕이 장작불로 온몸을 태운 뒤에 목을 베었다고 했고 삼국유사는 발바닥 가죽을 벗긴 뒤 불태워 죽였다고 한다. 아무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치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것 같다.
박제상의 아내는 딸들과 율포(栗浦)로 갔다. 날마다 치술령에 올라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하고 간절히 또 기도했다.
경주시와 울산광역시의 경계는 치술령의 정상(頂上)인데 대표적으로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 산161-1번지와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월평리 산155번지의 해발 782.2m인 정상 일대를 말하며 경주시 내남면 명계리 산 209-1번지와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봉계리 산 111번지 일대에 이르는 산 정상(頂上)의 맥(脈)으로 연결되어 있다.
남편이 떠나간 지 달포가 지났을 때 왜왕(倭王)에게 처참하게 화형(火刑)을 당했다는 억장(億丈)이 무너지는 소식(消息)을 들었다. 넋을 놓고 울다가 울다가 결국에는 죽어 버렸고 죽어서 돌이 되었다. 그래서 그 돌을 망부석(望夫石)이라 이름했으며 왕이 감격하여 계림국대부인(鷄林國大夫人)으로 책봉하였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서 일본 쓰시마(對馬)의 가미아가타정(上県町)의 사고(佐護) 마을에 신라의 사신(使臣)으로 왜(倭)에 와서 왕자 미사흔을 구해 낸 후 박제상이 죽은 곳이라 소개하여 지금도 해안가에 순국비(殉國碑)가 서 있다고 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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