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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소 대표
행정학 박사
윤 해 수 | ⓒ 황성신문 | -지난호에 이어
어느 날 왕이 마루에 앉아 있는데 새 한 마리(치술조)가 날아와 구슬프게 울며 “목도(木島)의 넋을 맞아 모국(母國)에 돌아왔는데 누구라서 알리요.”라고 쪼아놓고 날아가 버렸다. 이상하게 여긴 왕이 이 새(치술조)를 쫓아가 보게 하였는데 치술령 기슭의 바위 속으로 날아 들어가 버렸다. 그 새(치술조)가 박제상 부인의 넋으로 남편의 혼(魂)을 맞아 신라로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바위를 은을암(隱乙岩)이라 하고 치술령 국수봉(菊秀峰) 아래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은을길 272(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척과리 산 152번지)에 영신사(靈神祠)를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박제상의 부인은 치술령 산신(山神)으로 모셔졌으며 치술신모(鵄述神母)라 했다고 하며 지금도 정상에 신모사(神母祠)가 있었다는 표지석이 있다. 치술령 아래에 살던 사람들은 비가 오지 않으면 치술신모(鵄述神母)에게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고도 한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치술령길 7(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70번지) 일대에 조선 영조 21년에 치산서원을 개축(改築)하였으나 187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撤廢令)으로 없어졌다가 1993년 다시 복원(復元)하였으며 박제상을 모신 충렬묘(忠烈廟)와 부인을 모신 신모사(神母祠), 망부석(望夫石) 그리고 두 딸을 모신 쌍정려(雙旌閭)도 있고 같은 동 68번지에 충렬공 박제상 기념관도 건립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월평리, 척과리의 박제상 유적을 1997년 10월 9일 울산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하여 매년 3월 초 정일(丁日)에 향사(享祀)를 모시는 등 관광객을 맞이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런데 경주에서는 같은 치술령 고갯마루를 울산광역시와 경계(境界)로 하고 있으면서도 박제상과 그의 부인에 대한 기념관이나 재실(齋室), 충렬비각(忠烈碑刻) 등이 하나도 없고 망덕사지 아래 강가의 모래사장에서 박제상의 아내가 남편을 만나지 못해 눈물조차 메말라 버려서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으며 전신에 경련(痙攣)이 일어나면서 몸이 나무토막처럼 굳어져 펴지지 않았으므로 장사벌지지(長沙伐知旨)라고 했다는 유래지(由來地)에는 경주시 배반동 968-1번지의 제방 길가인데 음각(陰刻)으로 세워진 표지석(標識石)만이 덩그러니 있을 뿐 그냥 방치(放置)되고 있어 울산광역시와는 너무나 대조적(對照的)이다. 최치원의 유적(遺跡)이 전국적으로 많은 것처럼 박제상 또한 전국 여러 지역에서 앞다투어 전승(傳承)하고 있는데 반해 정작 그가 살았던 경주에는 유적(遺跡)이나 유물(遺物)이 없다. 박제상의 충절(忠節)에 대해 세종대왕은 ‘신라 천년에 으뜸가는 충신이다.’고 하였으며 정조 임금은 ‘그 도덕은 천추(千秋)에 높고 정충(貞忠)은 만세에 걸친다.’라고 극찬(極讚)하였다. 약 150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심금(心琴)을 울리고 있는 충(忠)과 열(烈)의 사상(思想)을 고취(高趣)하기 위해서라도 박제상과 그의 부인에 대한 스토리텔링 테마 파크(Storytelling Theme Park)를 조성(造成)하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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