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가장존 공인중개사 사무소 대표
행정학박사 윤 해 수 | ⓒ 황성신문 | -지난호에 이어
불경(佛經)에 따르면 세계의 중심이 수미산(須彌山)이다. 경주 낭산(狼山)이 원래부터 수미산(須彌山)이었다고 주장했으므로 중국이 변방(邊方)이 될 수밖에 없으며 선덕여왕 시대에는 신라의 자부심(自負心)과 자긍심(自矜心)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 도리천(忉利天)이 있다. 선덕여왕이 죽은 뒤에도 온 우주의 중심인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의 도리천(忉利天)에 제석천왕(帝釋天王)이 되어 종묘사직(宗廟社稷)을 돌보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선덕여왕이 묻힌 지 32년 되던 해인 679년, 문무대왕 19년에 낭산(狼山) 아랫 자락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창건(創建)하였다. 선덕여왕이 묻힌 곳이 사천왕사(四天王寺)의 윗부분이므로 그곳이 바로 도리천(忉利天)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지금도 사천왕(四天王)은 수미산(須彌山) 중턱 유건타라(遊揵陀羅) 산에 살고 선덕여왕은 그 위 도리천(忉利天)에 살고 있다.
신라 향가(鄕歌)인 제망매가(祭亡妹歌)와 도솔가(兜率歌)의 저자 월명 스님이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살았고 자비왕 때 사람으로 추정되는 거문고의 거성(巨星) 백결선생도 낭산(狼山) 아래에서 살았다.
신라 원성왕 6년, 경오년(庚午年)인 790년에 월명 스님이 사천왕사(四天王寺) 앞에서 피리를 불고 있으면 하늘에 떠가던 달도 그 소리에 취해 멈추어 섰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백결선생은 무척 가난하여 옷이 너무 해져 해진 옷을 100번 이상이나 꿰매고 꿰맨 자리를 또다시 꿰매어 항상 입고 다녀서 사람들이 메추리를 매단 것 같다고 하였다. 어느 해 연말(年末)에 설을 맞이하려고 집집마다에서 나는 떡방아 찧는 소리를 들으며 부인이 가난함을 탄식(歎息)했다. 그러자 백결 선생은 거문고로 떡방아 찧는 소리를 내어 부인을 위로했는데 그것이 오늘날까지 방아타령으로 계승(繼承)되고 있다.
그리고 의상대사가 29살의 젊은 나이에 낭산(狼山) 아래 황복사에 출가(出家)하여 스님이 되었다. 어느 날 황복사에서 의상대사와 신도(信徒)들이 탑돌이를 했는데 층계(層階)를 한 계단, 한 계단씩 밟지 않고 3자 높이로 뛰어올라 허공(虛空)을 밟으며 걸어 갔다고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의상전교(義湘傳敎)에서 전한다. 그리고 최치원의 옛 집도 미탄사(味呑寺) 남쪽 낭산(狼山) 서북쪽 기슭에 있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 말 최은함이라는 사람이 낭산(狼山) 기슭, 경주시 배반동 640-1번지 중생사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에게 기도를 열심히 하여 아들을 얻었는데 경애왕 4년, 927년 정해년(丁亥年)에 후백제군이 침공(侵攻)하여 갑자기 들어 닥치자 너무나 급한 나머지 갓난아기를 강보(襁褓)에 싸서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 옆에 숨겨 두고 피난(避難)을 했었다. 보름이 지나 후백제군이 물러간 뒤 돌아와 보니 관세음보살(觀世音菩)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며 돌보았는지 아이의 살결은 갓 목욕한 것처럼 하얗고 뽀송 뽀송하며 웃고 있는 입가는 촉촉이 젖어 젖 냄새까지 풍기고 있었다. 이 아기가 훗날 고려국을 개국(開國)하여 기틀을 잡는데 크게 기여(寄與)한 최승로이다.
낭산(狼山)의 북서쪽 산기슭과 밭에는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과 돌도끼, 토기 조각들이 산재(散在)되어 있어서 신석기 시대(新石器時代)와 청동기 시대(靑銅器時代)에도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증명(證明)이라도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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