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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덕사(望德寺) 이야기
황성신문 기자 / 입력 : 2023년 06월 09일(금)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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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소 대표
행정학 박사
윤 해 수 | ⓒ 황성신문 | 망덕사지는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956번지, 면적 24,304㎡,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指定)되었다. 남쪽은 비탈져 있으며 그 아래로 남천(南川)이 흐르고 있다. 절터에는 목조탑파(木造塔婆)의 기단(基壇)과 금당지(金堂址)가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당나라와 같은 외세(外勢)를 물리치기 위해 사천왕사(四天王寺)를 건립하였으나 당나라 고종황제에게는 황제의 도움으로 삼국을 통일하였으니 그 은혜에 보답하려고 절을 지어 매일 만수무강(萬壽無疆)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예부시랑(禮部侍郎) 악붕귀(樂鵬龜)를 보내어 사실인지를 알아오게 했는데 신라는 사천왕사(四天王寺)를 보이면 당나라의 침략(侵略)을 막기 위한 호국사찰(護國寺刹)임이 탄로(綻露)가 날까 염려하여 사천왕사(四天王寺)를 급조해서 모조품(模造品)으로 절을 짓게 하여 망덕사라고 했으며 685년, 신문왕 5년 4월에 완성(完成)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당나라에 대해 충성쇼를 하는 등 저자세(低姿勢)를 취하면서도 실속있는 외교(外交)를 하였다. 신라 제32대 효소왕(孝昭王)의 본명은 김이홍(金理洪)이며 이공(理恭)이라고도 한다. 할아버지는 김법민(金法敏)으로 문무왕이고 아버지는 김정명(金政明)으로 신문왕이다. 신문왕이 재위(在位) 12년 되던 해인 692년에 사망(死亡)하자 6살 어린 나이에 왕위를 선위(禪位)했다. 효소왕 9년에 경영이 반역(反逆)을 도모했다가 처형(處刑)되는 등 자그마한 사건(事件)들은 있었지만 바로 진압(鎭壓)이 되었고 당나라와 일본 사이에 등거리 외교(等距離外交)도 잘하여 국, 내외적으로 평화(平和)로웠다.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참고하면 697년, 효소왕 6년에 망덕사의 낙성식(落成式)을 했다. 효소왕이 가마(駕馬)를 타고 직접 법회에 참석(參席)했는데 어떤 헙수룩한 차림새의 거지 승려(僧侶)가 뒤뜰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일어서며 행사(行事)에 좀 참여 하게 하여 달라는 간청(懇請)을 했다. 12살의 어린 효소왕은 성스럽고 좋은 날인지라 거절(拒絕)을 할 수가 없었으므로 마지못해 맨 끝자리에 앉아 공양(供養)을 하도록 허락은 했으나 기가 막혔다. 삼국통일을 이루어 태평성대(太平聖代)에 도대체 도성(都城) 어디에 저런 거지같은 스님이 있을수 있단 말인가? 저런 초라한 모습으로 왕에게 감히 재(齋)에 참석할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그 배짱은 또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저 중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함께한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생각할수록 괘심(掛心)하기도 하고 화(火)도 나기도 하여 “스님은 도대체(都大體) 어디에 사는 누구신가?” 하고 기분 나쁜 듯 퉁명스럽게 물었다. “비파암(琵琶嵓)에 살고 있습니다” 하고 거지스님이 고(告)하자 “스님은 왕이 친히 불공(佛供)을 하는 망덕사의 낙성재(落成齋)에 참석하여 함께 공양(供養)했다는 사실을 어디 가서 말하지 말라.”고 거만(倨慢)하게 말했다. “폐하(陛下)께서도 어느 누구에게도 진신석가부처와 함께 재(齋)를 올리고 공양(供養)도 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라고 하드니 거지스님은 몸을 솟구쳐 하늘로 올라 남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깜짝 놀란 효소왕은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평가(評價)하여 무시(無視)해 버린 자신이 후회(後悔)스러웠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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