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신라 남천의 금입택 | ⓒ 황성신문 | |
 |  | | ⓒ 황성신문 | 내가 태어난 집은 남천 시래천변 초가다. 어린 날 아버지가 목수였으니 그나마 남의 집에 살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신라 전성기에는 무려 39채의 호화저택이 있었다. 이른바 금테 두른 저택, 즉 금입택(金入宅)으로 그 중에서도 으뜸은 남천에 있던 김유신의 재매정(財買井)종가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덕왕(702~737)때 극성기를 맞아 수도인 경주는 17만 8,936호이고, 1,360방, 55리, 39 금입택(金入宅) 4절 유택(四節游宅) 등이 있는 호화로운 도시이었다. 통일 후 약100여 년간 번영을 누렸다. 삼국통일시대 “경주호수가 17만 8천호×5인=890,000명이다. 지금의 경주시 인구보다 1천300년 전의 인구수가 훨씬 많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간다.
김유신의 재매정이 금입택인 것은 “증조부 김구해가 금관가야 마지막 구형왕”으로 법흥왕 때 항복하여 상등(上等) 벼슬과 본국 땅을 식읍으로 받았다. 662년 고구려와의 임진강 전투에서 대승, 1년 뒤인 663년 백제부흥운동을 제압한 공로로 재물과 노비를 받았다. 또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인 668~669년엔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상급을 받았다.
김유신은 신라 17관등 가운데 가장 높은 “각간(角干)”을 받았다. 백제 멸망의 공으로 “대각간”, 고구려 멸망 직후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의 벼슬을 얻었다. 기존의 17등급 위계보다 더 높은 ‘특특’의 지위를 준 것이다.
또 지소부인이 누구인가? 김유신은 남편이지만, 외삼촌이다.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희가 김춘추와 결혼해서 낳은 셋째 딸이 “지소부인”이다. 지소부인은 문무왕(태종무열왕의 장남)의 누나이기도 하다. 나중에 남편이 죽었지만 신라왕가의 딸이자 김해김씨 가문의 종부이다.
김씨 종가의 부인이 죽자 청연(靑淵)의 골짜기에 묻고, 재매곡(財買谷)이라 불렀다. 매년 봄철 남자와 여자들이 재매곡의 남쪽 시냇가에 모여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 백가지 꽃이 화려하게 피고 송화가 골짜기 안 숲속에 가득하였다.” 김유신 사후 재매정택의 부와 명예를 지켰던 여인이다.
경주는 신라시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았기에 지금도 구석구석 흙구덩이만 파도 유물이 쏟아진다. 건축하려고 하면 문화재급이 쏟아지니 건축할 수가 없다. 선산 있는 밀개산에 기왓장이 간혹 나오니 야산에도 살았을 일이다. 남천의 금입택은 현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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