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연애작전 하고자 남천의 유교에 빠진 원효 | ⓒ 황성신문 | |
 |  | | ⓒ 황성신문 |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 믿은 것이 깊이 찾아보면 모호하거나 쉽게 “설화(說話)”라고 얼버무리고 만다. 신라 설화 중에 그런 일이 많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이야기”도 조금만 깊이 들어가 보면 모호하게 답한다. 현실에서 보면 아무도 그 사실을 확인하지 못한다. 남천의 “월정교 사랑이야기”가 아니고 “유교(楡橋, 느릅나무 다리)”라고 한다.
신라 태종무열왕은 딸이 시집갔다 과부되어 돌아왔다. 원효는 저잣거리를 떠돌면서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준다면 내 기필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베어올 것”이라 노래하고 다녔다. 왕은 자루 없는 도끼가 과부요, 하늘 떠받칠 기둥은 현인을 뜻한다는 것으로 알고, 요석공주와 맺어주려고 하였다. 원효를 대령하라고 명하여 원효는 금오산에서 내려왔다. 원효는 궁궐 앞에 도달하자 유교(楡橋)의 물에 스스로 뛰어들어 옷을 적시었다. “옷 말린다.”는 핑계로 요석궁에 사흘 동안 머문 후에 설총을 낳았다.
원효대사가 뛰어내린 다리가 모호하다. 유교는 월정교에서 19m거리 아래에 있는 “유교지(址)” 가?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월정교로 알고 있는 곳인가? 월정교를 복원하면서 발견한 나무는 “소나무(혹은 나무)”이었다. 이를 삼국유사에 옮긴 일연스님도 모호하다고 한다. 삼국유사 「향전」에서 인용하여 원효와 요석공주의 로맨스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 스스로도 기이한 일이라면서 그 내용을 부정하였다.
요석공주가 임신한 후 사랑은 더욱 애처롭다. 궁에 단 사흘 머물렀다. 원효는 고향 압량 “반룡사”로 갔다. 만삭의 공주는 남편을 만나지 못하고, 절 아래 삼성산 자락의 경산시 “유곡동” 한 민가에서 해산하였다. 또 원효가 경기도 동두천 “소요산”에서 수행할 때 아들을 데리고 찾아갔다. 남편을 만나러 갔으나 못 만나자 산 아래에다 아예 “요석별궁”을 짓고, 수도하는 원효대사를 향해서 아들과 함께 절을 올렸다. 둘은 끝내 함께하지 못하였다.
둘의 사랑 일화가 만들어졌다(?)고 주장도 한다. 삼국유사「향전」을 인용하면서 원효와 요석공주의 로맨스를 소개하고 있지만,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도 “스스로 기이한 일”이라고 하면서 내용을 부정하였다. 또 「설총전」에 어머니가 공주였다는 기록도 없다. 설화로만 반영한 것뿐이다.
그럼에도 원효대사와 요석공주는 남천에서 신라 10현의 설총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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