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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소 대표
행정학 박사
윤 해 수 | ⓒ 황성신문 |
-지난호에 이어
삼국유사 유덕사(有德寺)조에 의하면 신라의 대부각간(大夫角干) 최유덕(崔有德)이라는 사람이 자기 집을 헐어버리고 절을 지었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유덕사(有德寺)라고 했으며, 후손인 고려의 삼한공신(三韓功臣) 최언위(崔彦撝)가 유덕의 진영(眞影)을 걸어 모시고 또 비석(碑石)을 세워 명복(冥福)을 빌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덕사는(有德寺) 최씨 문중에 원당(願堂)이다. 일제강점기(日帝強占期)에는 경주시 도지동의 유덕사지(有德寺址)를 이거사지(移車寺址)라고 했다.(이구열, 1996) 2018년 경주시, 경주시의회, 경주문화재제자리찾기시민운동본부가 이거사지(移車寺址)를 발굴하고 복원하여 청와대(靑瓦臺)에 있는 불상(佛像)을 반환(返還)받아 이전하기 위해 민관추진위원회를 조직(組織)했으며 2019년 이후 문화재청 국고보조사업(國庫補助事業)으로 경주 이거사지(移車寺址)의 학술조사와 청와대(靑瓦臺)에 있는 불(佛像)상 반환(返還)과 이전의 계획이 수립(樹立)되고 진행하여 발굴조사기관인 신라문화유산연구원에 의해 시굴(試掘)과 발굴조사(發掘調査)가 실시되고 있다. 경주 도지동 332-1번지 일대, 형제산 기슭에 조선시대 동도명기(東都名妓), 홍도(紅桃)의 묘(墓)가 아름드리 소나무와 대나무로 둘러싸인 포도밭 언저리에 있었는데 누군가가 해마다 벌초(伐草)를 하는 등 관리(管理)를 하고 있었으며 무덤가에는 태풍때 산사태로 발견된 조그마한 돌비석(碑石)이 세워져 있었다. 이 비석(碑石)은 그가 죽고 난 후 경주의 풍류객을 비롯한 교방(敎坊)의 여러 악공(樂工)과 기생(妓生)들이 악부(樂府)의 스승으로 추앙(推仰)하면서 명복(冥福)을 바라는 뜻으로 돈을 기부(寄附)하고 모아서 만들어 세웠다. 그런데 코아루 아파트(Koaroo Apt) 단지를 조성하면서 묘비(墓碑)는 부서져 없어지고 2005년에 무연고(無緣故) 분묘(墳墓)로 처리가 되어서 화장(火葬)을 한 후 건천 영호공원 납골당(納骨堂)에 안치(安置)하고 있다.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경주 석장동 금장대 입구의 소공원(小公園)에 경주지역 문화예술인(文化藝術人)들을 중심으로 홍도총괄기념사업회(紅桃總括記念事業會)를 조직하여 수년간의 노력으로 지난 2016년 4월 16일 추모비(追慕碑)를 건립했다. 명문에는 “임은 한 송이 붉게 핀 복숭아꽃 세상의 풍랑(風浪)은 거칠고 사나웠으나 임은 한 시대의 한(恨)을 온몸으로 감싸 안은 채 고결(高潔)한 삶을 잊지 않았다.” 이였다. 그리고 2016년부터 해마다 그녀의 후학양성(後學後學)에 대한 고귀한 뜻을 기리고자 경주지역의 문화예술인(文化藝術人)들이 재능기부와 십시일반(十匙一飯) 협찬으로 추모예술제(追慕藝術祭)를 지내고 있다. 최계옥은 본관(本貫)이 경주이며 호(號)가 홍도(紅桃)이고 자(字)는 초산월(楚山月)이다. 그의 아버지는 경주 지방의 세도가(勢道家)인 가선대부(嘉善大夫) 최명동이며 어머니는 세습관기(世襲官妓)였으며 사회관습인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최계옥은 어려서부터 관기(官妓)가 되었다. 10세 되던 해에 시(詩)와 서예(書藝)에 통달했으며 음율(音律)을 깨우쳤는데 20세에 경주부윤(慶州府尹)의 추천을 받아 상의원(尙衣院)의 이패(二牌)로 들어갔다. 노래와 춤으로 한양 장안에서는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독보적(獨步的)인 존재였다고 한다. 홍도(紅桃) 최계옥(1778~1822년)은 조선 정조 임금으로부터 홍도(紅桃)라는 별호(別號)를 하사(下賜)받았으며 황진이처럼 유명한 기생(妓生) 못지않게 이름을 널리 알린 천재예술인(天才藝術人)으로써 특히 후학양성(後學後學)을 위해 여생을 아낌없이 보낸 사람이다. 정조 임금의 장인(丈人)인 박준원이 상처(喪妻)를 당하자 11년 동안을 그의 소실(小室)로 살았으며 남편이 사망하자 장례(葬禮)를 치르고 난 후 경주인 고향으로 내려와 그동안 궁궐(宮闕)에서 배우고 익힌 실력으로 13년 동안을 후진양성(後進養成)에 심혈을 기울였다. 1960년 후반까지 노서리대릉원일원의 금관총 서쪽의 마을 가운데에 홍도와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동도권번(東都券番)이 있었다. 각설(却說)하고 동도악부(東都樂府)의 사종(師宗)으로 열심히 활동했으나 젊은 나이에 병(病)이 들어 고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자 남은 재산(財産)을 모두 어려운 친척과 이웃에게 나눠 주었다. 1822년, 향년(享年) 45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조선 시대 때 왕이 직접 기생(妓生)에게 별호(別號)를 하사(下賜)한 일은 매우 특이하며 특히 기생(妓生)의 무덤에 묘비(墓碑)를 만들어 세우고 또 전하는 것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소중할 수밖에 없는 문화유산(文化遺産)이므로 없어진 묘비(墓碑)를 찾아서 경주 석장동 금장대 입구의 소공원(小公園)에 있는 추모비(追慕碑)와 함께 세워서 영구히 보존(保存)해야 한다. 만약 찾을 수 없다면 경주문화원장이신 소당 조철제 선생님께서 탁본(拓本)으로 보관(保管)하고 있는 것을 본떠서 다시 만들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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