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가장존 공인중개사
사무소 대표
행정학 박사
윤 해 수 | ⓒ 황성신문 |
-지난호에 이어 삼존불(三尊佛)은 여래좌상(如來坐像)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보살(脇侍菩薩)이 있다. 오른손은 무릎에서 아래로 향하고 있고 왼팔은 굽혀서 손을 배에 얹고 있다. 양쪽 협시보살(脇侍菩薩)이 서 있는데 본존불(本尊佛)처럼 법의를 걸치고 있다. 오른쪽 협시보살(脇侍菩薩)은 보병(寶甁)을 오른손에 들고 서 있고 왼쪽 협시보살(脇侍菩薩)은 연꽃을 왼손에 잡고 서 있는데 어깨 높이까지 세워져 있다. 삼존불상(三尊佛像)앞에 사각으로된 바위로 각 면마다 사방불(四方佛)을 모셨는데 모두 연꽃 위에 좌정(坐定)하고 있다. 불상(佛像)들이 축대 위에 반듯하게 있고 기와조각들이 주위에 산재(散在)해 있는 것을 보면 삼존불상(三尊佛像)과 사방불(四方佛)을 중심으로 법당인 건축물(建築物)이 지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칠불암(七佛庵) 뒤 절벽으로 이루어진 곳의 위쪽에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慶州南山神仙庵磨崖菩薩半跏像)은 1963년 보물 제199호로 지정(指定)되었다. 화려한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쓰고 오른손에는 꽃을 들고 왼손은 엄지와 장지(長指)를 서로 맞붙이고 있다. 오른발은 대좌(臺座) 아래의 연꽃 족좌(足座)를 밟고 있고 왼쪽 다리는 오른편 허벅지 위에 올려 유희좌(遊戲坐)같은 반가좌(半跏坐)를 취(取)하고 있다. 절벽의 바위 면을 얇게 깎고 불상(佛像)의 모습은 두껍게 파서 두드러지게 하여 표현하는 고부조(高浮彫)의 기법으로 자연(自然)의 암벽(巖壁)에 새긴 마애불(磨崖佛)인데 절벽 위로 흰 구름이 지나갈 때면 마치 구름을 타고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둥그스름한 얼굴에 두 눈은 지그시 감고 있어서 깊은 상념(想念)에 잠긴 듯 천상(天上)에서 중생(衆生)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 같다. 칠불암(七佛庵)에 소속된 신선암(神仙庵)이라고 하여 신선암 마애불(神仙庵磨崖佛)이라 하고 있는데 신라 시대에는 어떤 이름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천암곡(千岩谷)은 골짜기의 길이가 약 800m이다. 경주시 남산동 산36-1번지의 맨 꼭대기에는 일천바위가 있는데 입구에 화랑교육원(花郞敎育院)이 들어선 이후부터는 화랑바위라고도 한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 일천명(一千名)이 단합(團合)하여 서로 돕고 살아가는 평화(平和)로운 마을이 있었다. 먹고 살기가 풍부(豐富)한 것을 시기(猜忌)한 마군(魔軍)들이 이 마을을 침략(侵略)했다. 마을 사람들은 죽을힘을 다해 대항(對抗)했으나 그 마군(魔軍)들을 상대하기에는 불가항력(不可抗力)이었다. 그래서 이 산꼭대기로 피난(避難)을 와서는 매일을 천신(天神)에게 치성(致誠)으로 기도(祈禱)를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깜깜해지면서 폭우(暴雨)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몇 날 며칠을 많은 비가 내리니까 벌판과 골짜기 등 모든 산 정상(頂上)까지 물에 잠기어 버렸다. 미륵곡 정상(彌勒谷頂上)인 신 하나를 엎어놓은 정도(程度)가 잠기지 않았다고 하여 신 대배기봉이라고 부르는데 그곳만 남겼다. 비가 그치고 물이 빠져 며칠이 지난 후 살펴보니 마군(魔軍)들은 홍수(洪水)에 모두 떠내려가고 바위를 의지(意志)하여 서로 껴안고 있으면서 안간힘으로 버티며 대피(待避)한 일천명(一千名)만 살아남았다. 일천명(一千名)이 바위 위에서 홍수(洪水)를 피했다고 하여 일천바위라고 불렀다고 하며 홍수(洪水)가 휩쓸고 간 벌판에 집을 짓고 옥토(沃土)를 만들어 행복(幸福)하게 살았다고 한다. 일천바위 남쪽 편에 험상지게 생긴 바위돌이 바위틈에 붙어 있는데 이는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던 마군(魔軍)들의 우두머리인 마왕(魔王)의 머리라고 한다. 옛날에는 간혹 해일(海溢)이 이곳까지 넘쳐 들어왔다고 한다. 일천바위에서 약 100m 서남쪽으로 남산부석(南山浮石)이 있는데 뜬바우, 또는 부석(浮石)이라고도 한다. 실의 양쪽 끝을 마주 잡고 바위 밑으로 넣어서 같은 방향(方向)으로 당기면 끊어지지 않고 통과(通過)가 되어 바위가 공중(空中)에 떠 있다고 한다. 버선을 거꾸로 하여 세워놓은 것처럼 보이므로 국사곡(國師谷) 버선바위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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