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생애 최초 1966년 울릉도 도동항에 도착하다 | ⓒ 황성신문 | |
 |  | | ⓒ 황성신문 | 그렇게 배를 탔다. 1966년 8월 18일 아침 울릉도 도동항에 도착하였다. 우리 일행 28명을 초청한 분은 마중 나오지 아니하였다. 앞이 캄캄하다. 1인당 쌀 한 되, 현금 일천 원씩 가지고 집 나온 것이다. 동아일보에서 식생을 그린 달랑 울릉도 지도 한 장이 전부다. 그 지도가 유일 하게 가이드로 삼을 뿐이다.
1965년 포항에 갔던 기억으로 28명이 형산강 따라 포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380t 청룡호는 태풍으로 꼼짝하지 아니하였다. 촌아이들이라 영화구경도 가고, 손에 들어 있던 돈은 막 써댔다. 이틀 밤 자고 17일 출항하였다.
아직 태풍해제가 덜 되었는데도 승선 480명 청룡호는 출항하였다. 평상시 열 시간이면 도착하였는데 네 시간을 더 넘겼다. 배가 45도로 기울면서 동해바다를 밤새 헤맸다. 입고 간 하얀 하복은 마룻바닥을 하도 문질러서 새카맣게 변했다.
울릉도 지도로 실제 방향에다 맞춰 놓고, 좌측 전신전화국으로 치달아 산길을 올랐다. 사동 산속 외딴 집을 발견하고, 초청한 선생님을 만났다. 토사곽란으로 함께하지 못한다. 아니 꼼짝 못하니 감자밥이나 먹고 가란다. 어쩔 수 없어 그 길로 모시개〔苧洞〕를 향해 걸었다. 잔뜩 흐린 오후에 저동초교를 찾아들었다.
일직교사 만나 교실 한 칸을 빌리었다. 책상 모아 침상으로 만들고, 유리창 커튼 걷어내려 이불 삼았다. 교장선생님 배려로 비상연락망에 의하여 2인 1집 찾아가 저녁을 얻어먹었다. 비가 5일간이나 계속 내리다, 그쳤다 하였다. 봉래폭포와 저동항구의 촛대를 구경하고, “박정희대장울릉도순찰기공비”를 찾았다. 오후에 나리분지 넘어서 평리초교까지 걸었다. 그날 저녁밥은 굶었고, 잠만 잤다.
태하등대를 방문하고 굶주린 배로 남양초교까지 또 걸어갔다. 모두가 허기지고 지쳤다. 교실 빌리고, 보리쌀과 국수 사다 양동이에 끓였다. 나무 꺾어 젓가락 만들어 건져 올렸다. 라디오에서는 아직 태풍해제가 안 되었다고 한다. 또 장흥초교까지 걸어가서 1박 하였다. 그곳 교장 선생님도 비상연락망으로 우리를 먹이었다. 오후 울릉초교로 향했다. 태풍이 해제된다고 하였다. 아이디어를 내었다. 교육장이 경주 산내면 분이다. 당장 10여 명을 데리고 찾아가 떼를 썼다.
여차저차 하여 선비(船費)가 없다고 하니 난색이다. “우리는 돈을 달라는 것이 아니고, 공문서 한 장 만들어 달라.”고 하였다. 돈이 안 드니 쉽게 교육장 직인 찍어주었다. 저녁 청룡호에 승선하고, 이튿날 퐝항구에 도착, 형산강 따라 왔다.
형산강 상류에서 졸졸 물이 흘러 퐝에 도착, 동해 속으로 울릉도 다녀왔다. 이런 내용으로 제9회 대한민국 독도문예대전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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