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황성신문 | |
 |  | | ⓒ 황성신문 | 교육대학 졸업하고 첫 직장으로 1973년 5월 1일자 초등학교 교사직을 받았다. 포항시교육청 산하 영일군 지행면(현 장기면) 모포국민학교에 발령이 났다. 누구에게 물어봐도 그곳 모포(牟浦)를 아무도 몰랐다. 허겁지겁 포항시교육청으로 갔다. “발령통지서”를 받아야 현지 학교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형산강 따라 직행버스에 올랐다. 포항 시외버스주차장에서 시내버스 타려고 걸어갔다. 오거리 죽도시장이다. 또 육거리 교육청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담당 장학사님을 찾아 갔는데 불호령이 떨어졌다. 세상에나 하늘이 노랬다.
“엽서로 발령통지를 보냈는데 왜 5월 1일자에 오지 않았지요?”라고 물었다. “외지 울산에서 아르바이트 하였습디다. 우편함도 없는 데 마당에 엽서 한 장을 던져두고 갔어요. 질녀가 거름 터에 바람 따라 쓸려 다니고 있던 엽서를 주워서 저에게 가져왔습디다. 여하튼 늦게 와서 미안합니다.” “당신 말이야! 오지에 발령 났다고 일부러 늦게 온 게 아닌가? 1주일 지나면 발령 포기라인기라….” “예? 저는 발령 나기를 학수고대 하였습니다.”, “그라면 됐고요. 교장선생이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가 보시요!”성화가 치밀어도 꾹 참아야 하였다.
그때는 분명 학교현장에서 평교사와 장학사 사이는 엄격한 상하관계였다. 근무평점을 매기기에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때 하고 싶었던 말은 “앞으로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발령장은 엽서로 보내지 말고, 등기로 발송하시오! 그렇게 중요한 국가서류를 5원짜리 보통엽서 한 장으로 보내다니?”
약한 자여 그대는 초등학교 무명교사 이느니라. 5원짜리 보통엽서로 인사발령통지서 보내 놓고 높은 청에 앉아서, 고자세로 따지기만하면 다 되던 그런 시절이다. 우리나라의 관료적 행정체제를 언제 바룰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학교발령 받고, 근무하려면 고개 숙여 모두 받아들이고, 오로지 발령장 받은 것만으로도 기쁨 그 자체로 여기고 숙명적으로 살아야 하는 민초일 뿐이다.
발령통지서 들고 육거리, 오거리 걸어 퐝시내버스정류장에서 구평 가는 막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면서도 가슴은 설렜다. 모포 입구 “땅고개”는 마을공동묘지다. 정류장표지도 없다. 낮에도 혼자면 무서운 곳이다. 동해다. 푸른 바다다.
함께 내린 사람들 뒤따라가면서 학교 위치를 물었다. “아이고, 모포에 선생 하러 오는 가베요? 반갑심다. 제 막내가 4학년인데 혹 모르니까 잘 봐 주이~세.” 정말 나는 첫 담임으로 그렇게 4학년 50명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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