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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소 대표
행정학 박사
윤 해 수 | ⓒ 황성신문 |
-지난호에 이어
조양동(朝陽洞) 산8번지에 형제(兄弟)지 간의 묘소(墓所)인 효소왕릉(孝昭王陵)과 성덕왕릉(聖德王陵)이 있으며 동북쪽에는 허물어져 흔적(痕迹)만 남아있는 토성(土 城)의 마루인 성(城)말네이고개가 있고 성 (城)말네이를 지나 알나앗재의 남쪽으로 넘 어가면 천군동(千軍洞)이다. 알나앗재는 어떤 임산부(姙產婦)가 고개 너머에 있는 친정(親庭)으로 아기를 낳으 려고 가던 중 고개를 넘어 걸어가다가 산통 (產痛)이 와서 급한 김에 고갯마루에서 알 라(애기)를 낳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 다. 성(城)말네이고개 아래에 옹기점(甕器店) 이 있어서 오지밋골 또는 오점곡이라는 마 을도 있었다고 한다. 효소왕릉(孝昭王陵)은 대한민국의 사적 (史蹟) 제184호로 지정(指定)되어 있다. 그 러나 이 묘소(墓所)가 효소왕(孝昭王)의 릉 (陵)이 아니라고 주장(主張)하는 사람도 있 다. 한국 고대사를 전공한 역사학자(歷史學 者)이며 전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교수(敎 授)로 경주대학교 대학원 원장을 역임(歷 任)한 고(故) 이근직 교수(敎授)는 현재 배 반동에 있는 신문왕릉(神文王陵)이 효소왕 릉(孝昭王陵)이라고 주장(主張)하기도 했 다. 효소왕(孝昭王)은 통일신라 시대 제32대 왕(王)이다. 성(姓)은 김씨(金氏)이고, 이름은 이홍(理 洪)이었는데 후에 이공(理恭)으로 개명(改 名)하였다.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의 아들로 691년의 5세 되던 해에 태자(太子) 가 되었고, 692년 음력 7월인 6세 때에 신문 왕(神文王)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王位)를 계승(繼承)했다. 재위(在位)한 지 11년인 702년 8월에 16 세의 일기(一期)로 죽자, 시호(諡號)를 효 소왕(孝昭王)으로 했다고 하며 너무 나이 가 어려서 재위(在位) 11년 동안 어머니인 일길찬(一吉湌) 김흠운(金歆運)의 딸 신목 태후(神穆太后)가 8년을 섭정(攝政) 했다고 한다. 효소왕(孝昭王)은 미혼(未婚)이었고 자식이 없어서 사망(死亡)하자 동생인 성덕 왕(聖德王)이 즉위(卽位)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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