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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동(朝陽洞)은 석기시대(石器時代)에도 사람이 살았다.(4)
황성신문 기자 / 입력 : 2023년 10월 13일(금)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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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학 박사
윤 해 수 | ⓒ 황성신문 | 성덕왕릉(聖德王陵)은 효소왕릉(孝昭王 陵)과 같은 동 같은 번지인 동편에 있으며 1963년에 사적(史蹟) 제28호로 지정(指定) 되어 있는데 삼국사기에 따른 학계(學界) 의 주장(主張)에 의하면 이거사(移車寺) 남 쪽에 장사(葬事)를 지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전이거사지(傳移車寺址)가 성덕왕릉(聖德 王陵)의 북쪽인 도지동에 있기 때문에 성덕 왕릉(聖德王陵)이 확실하다고 한다. 릉(陵)에는 신라 시대의 입체(立體)로 만 든 십이지신상과 받침돌이며 돌사자 그리고 무인상(武人像) 등이 화려하기도 하며 훼손 (毁損)이 많이 되기는 했어도 비교적 보존 (保存)이 잘 되어있는 편이다. 1962년 국보(國寶)로 지정(指定)된 성덕 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으로 널리 알려진 성덕대왕(聖德大王)은 김씨(金氏)이며 본명 이 융기(隆基)였는데 당나라 현종(玄宗)과 이름이 같다고 하여 바꾸었다. 재위기간(在位其間)은 702년에서 737년 인 35년 동안이며 역시 어린 나이에 왕위 (王位)를 계승(繼承)했다. 효소왕(孝昭王)의 재위(在位)가 6세에서 16세까지이었다는 것을 감안(勘案)하면 성 덕왕(聖德王)의 왕위(王位) 계승(繼承)은 아 마 15세가 채 되지 않았을 때일 것이다. 당나라와는 해마다 조공(租貢)을 사신(使 臣)을 통해 보내는 등 적극적인 정치외교 (政治外交)를 하였으며 국가는 내외적으로 가장 안정된 전성기(全盛期)였다. 722년 성덕왕(聖德王) 21년에 국가의 토 지 지배력을 강화하고 수취체제(收取體制) 를 정비하려는 목적으로 백성들을 위해 정 전제(丁田制)를 실시하여 농업 생산력을 증 대(增大)시켰으며 흉년(凶年)이 든 해의 춘 궁기(春窮期)에는 백성의 구휼(救恤)에도 최선을 다하였고 호국불교 이념(理念)도 매 우 강했다. 첫 번째 부인은 성정왕후(成貞王后)이었 으나 외척(外戚) 세력을 약화(弱化)시키기 위해 716년 3월 왕후(王后)를 왕궁(王宮)밖 으로 내보내야만 했으며 왕후(王后)가 궁궐 (宮闕)에서 나가자마자 태자(太子)가 죽어 버렸다. 720년 3월 이찬(伊湌) 김순원(金順元)의 딸인 소덕왕후(炤德王后)를 계비(繼妃)로 맞아 4년 동안을 함께 했으나 724년 12월에 사망(死亡)하자 승하(昇遐)할 때까지 13년 을 부인이 없는 고독한 삶을 살았다. 조양동(朝陽洞) 유적은 평동(坪洞)의 유 적(遺蹟)과 함께 와질토기가 출토(出土)되 었고 60호 널무덤에서는 무늬가 없는 청동 거울과 호랑이 장식 허리띠가 출토(出土)되 었다. 이런 유적(遺蹟)들을 사용한 시기(時期) 를 고고학계에서는 삼국시대(三國時代)보 다 더 앞선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라고 주 장하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의 신라 의 건국(建國)이 기원전 57년이라는 설(說) 을 이 유적(遺蹟)의 발굴(發掘)로 인해 증명 (證明)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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