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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학 박사
윤 해 수 | ⓒ 황성신문 |
- 지난호에 이어
큰대일(大逸) 남서쪽에서 내남면 명계리 바탕골로 넘어가는 질매재가 있는데 이는 소의 등에 짐을 싣는 질매(멍애와는 또 다른 소등에 짐을 싣기 위해 만든 기구)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시동(矢洞) 큰대일교 앞 시동(矢洞) 671-1번지에 월성이씨 정려각(月城李氏旌閭閣)이 있다. 류문식(柳文湜)이라는 사람이 20세인 경주최씨(慶州崔氏)와 결혼(結婚)을 하여 어머니인 월성이씨(月城李氏)를 모시고 살았는데 2년 뒤 남편인 류문식(柳文湜)이가 중병(重病)에 걸리자, 부인(夫人)인 경주최씨(慶州崔氏)가 자신의 손가락을 물어뜯어 흐르는 피를 입에 드리워서 먹였으나 남편(男便)이 죽어 버렸다. 그래서 죽기로 작심(作心)하고 있을 때 시동생(媤同生)인 현식(賢湜)이가 적극적(積極的)으로 위로(慰勞)하고 말리며 자기의 맏아들을 형수(兄嫂)인 최씨(崔氏)에게 양자(養子)로 보냈으며 전(田), 답(畓)을 형수(兄嫂)에게 주어 가세(家勢)를 돌보아 주었다. 그래서 양쪽 집안이 우애(友愛)롭게 잘살게 되었는데 시어머니인 월성이씨(月城李氏)가 88세까지 장수(長壽)하였다. 지금은 100세 시대(時代)라서 88세의 노인(老人)네가 많지만, 환갑(還甲)을 넘기기가 어려웠던 그 당시(當時)로써는 일개(一介) 군(郡)이나 시(市)에서 조차도 보기 드문 장수(長壽)한 노인(老人) 인지라 형수(兄嫂)와 시동생(媤同生) 지간의 우애(友愛)가 돈독(敦篤)하고 시어머니를 편하게 잘 모셔서 만백성(百姓)들에게 귀감(龜鑑)이 되었다고 하여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내렸다. 1935년 일제 강점기 시대(日帝強占期時代)에 후손(後孫)들이 정려각(旌閭閣)을 세웠는데 지금은 고흥류씨(高興柳氏) 문중에서 관리(管理)하고 있다.
샛대일은 큰대일과 뒷대일의 사이에 있어서 간대일(間大逸)이라고 하는 줄 알았는데 실재(實在)는 큰대일 남쪽으로 하여 월성이씨 정려각(月城李氏旌閭閣)을 지나 외동읍 북토리로 가는 큰대일과 북토리 사이에 있다. 마을 앞의 들은 전(田)을 답(畓)으로 개간(開墾)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토박한 논으로 구성(構成)된 들이라고 하여 번답(反畓)들 이라고 하며 샛대일의 앞에 나지막한 산(山)이라고 하여 이름한 새치앞산도 있다. 샛대일 북쪽골짜기는 화로를 닮은 바위가 있어서 화리바우골 이라고 하고 화리바위의 남쪽골짜기에 소나무가 많아서 송두골 또는 소뭇골이라고 한다.
샛대일과 큰대일 사이에는 활대(대나무 장대)처럼 길다랗게 생겼는 활대배미라는 논이 있었다.
-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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