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경주고속버스터미널 | ⓒ 황성신문 | |
 |  | | ⓒ 황성신문 | 경주고속버스터미널은 1972년부터 영업하였다. 경주시외버스터미널 가는 길에 있다. 예전에 바쁠 때는 시외버스 배차시간이 짧아 시외버스정류장을 자주 이용 하였고, 시간이 느긋하면 고속버스터미널을 이용하였다. 참 아이러니하다. 바쁘면 시외버스터미널, 느긋하면 고속버스터미널이 맞는가? 대구 도착시간은 같았다.
경주고속버스터미널하면 생각나게 하는 것이 결혼관계로 2층 커피숍에 들렸다. 1974년 2월 9일 토요일 불국사 장날이다. 중매는 경주여상 K교장선생님이다. 영일군에서 교사할 때 토요일 오후 우리 집으로 찾아온다기에 정신이 하나도 없이 부리나케 준비하여도 무척 바빠하였다.
그때 농촌의 환경은 말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계신 큰형님 집으로 예비 장모와 처자가 함께 온다하였다. 마을입구 물 포구나무 우물가에서 동네아주머니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정작 큰형님 집에는 모친만 잠깐 인사하고 나오고 말았다. 시골의 환경으로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혼하여 그곳에 살 곳도 아니다. 당황하여 보자기에 중고시절 앨범과 교육대학 졸업앨범, 대학시절 개인사진첩 등 세 권을 황급히 둘둘 묶어 싸고 뒤 따랐다.
불국사기차역 앞은 경주분지 소한들 논뿐이다. 대학 1학년 때 직접 유치한 경주여상(현재 경주여자정보고)을 구경한다기에 논둑길 걸어가면서 소개하였다. 일곱 살부터 살았던 옛 사간초가를 지나 못 둑에서 학교 전경만 보고 돌아섰다. 그리고 역전으로 향하여 소한들판 바람 맞으며 올라왔다.
삼십 리 길 시내버스 속에서 좌불안석이었다. 별 뾰족한 대화할 이야기도 없이 경주시내에 닿아 박물관, 동궁과 월지, 반월성, 첨성대, 팔우정로터리, 경주역을 거쳐 경주고속버스터미널까지 와 하차하였다.
대구행 고속버스표 두 장을 사고 보니 그래도 시간이 남았다. 2층 커피숍으로 올라갔다. 경주가 아무리 관광지라도 시골이었다. 그래도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이 흘러갔다. 고속버스가 출발하려는 시간 전에 내려갔다. 무겁게 들고 다니던 나의 생애 생활증명인 앨범 세 권을 드렸다. 지난 생활을 봐달라는 뜻이었다.
경주고속버스터미널은 지금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다. 나중에 알았지만 앨범 세 권 때문에 참말로 결혼하게 된 사연이 다소라도 있긴 하였다.
경주고속버스터미널은 나에게 인생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혼하고, 급히 대구를 가려고 하면 표가 없었다. 초교 여자동기가 그때 동양고속 회사의 매표원이어서 예비좌석의 표 끊을 수 있었다. 그만큼 처가 가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고마웠다. 이것도 터미널에서 오가는 애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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