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예비고사 합격증 | ⓒ 황성신문 | | “아버지, 공부하지 말라”는 공부이지만 의지를 꺾지 못하였다. 1970년 12월에 1971학년도 제2회 대학입학예비고사 치르려 경주에서 대구까지 기차를 탔다. 그때는 예비고사를 치러야 대학(교)에 본고사 칠 자격을 얻었다.
예비고사제도란 1969년부터 초급대학ㆍ4년제 대학교와 2ㆍ5년제 전문학교가 있던 시절의 제도이다. 대학(교)을 가려면 예비고사에 합격하여야 한다. 물론 전문학교는 예비고사를 치를 필요가 없다. 예비고사제도는 대학 모집정원의 150%만 합격증을 발부해 주었다. 저절로 대학진학예정자 수를 추려버리는 제도이다. 예비고사에 떨어져도 전문학교는 갈 수 있다.
인문계고등학교 졸업반에 오르면 예비고사 준비를 부지런히 하여야 한다. 시험 치는 장소는 경상북도 대구시다. 기차 타고 모량천을 지나 건천천을 따라 영천 넘어 대구역에 내렸다. 대구역에 내려 99원짜리 정식을 삼환식당에서 사 먹고 중앙통 걸어 삼덕로터리 소재 대구상고 운동장에 갔다. 곁에 있던 사대 부고는 내일 시험 칠 교실이므로 확인하고, 삼덕동 소재 여관에 들었다.
여관방에 여남 명씩 들어갔다. 누가 피곤하다고 박카스를 나눠주었다. 주는 데 너무 고마워 마셨다. 큰일 났다. 말똥말똥 밤새 잠이 오지 않았다. 박카스의 카페인 효과다. 덕택에 요약 수학공식, 물리공식을 잘 보았다. 그것은 참 이로웠다. 이튿날 그 공식들이 오롯이 예비고사 시험지에 나왔다.
아침에 늦잠자고 2층 창문 열고 보니 그곳이 “대구교도소(삼덕동)”앞이다. 면회하려는 사람들이 우산 쓰고 기다리는 것이 창 너머로 보였다.
우리 집에서는 예비고사를 치는 지, 소 말뚝을 박는 지도 몰랐다. 도시는 확실히 도시다. 후배들이 모여들어 시험장 교문 앞에 도열하여 선배들이 시험 잘 치도록 응원하여 주고 있었다. 우리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아무튼 고마웠다. 수험표를 확인하고, 사대부고 도로변 2층 목조교실 시험장에 들어갔다.
공부하고 관문을 통과하려면 그 시절 그때는 “대학입학예비고사”를 반드시 치러야 하였다. 한 달이 지나 예비고사합격증을 담임선생님으로부터 교부받았다. 희비쌍곡선이 터졌다. 인문고 인문계열 동기들은 겨우 반만 통과하였다.
그러나 또 대학(교) 본고사를 준비하여야 한다. 교육대학 진학이라 전 과목(국어, 수학, 영어, 사회, 과학, 음악, 미술, 체육, 선택=농업 등)을 치렀다. 산 넘고, 강물도 건너야 사람이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형산강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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