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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학 박사
윤 해 수 | ⓒ 황성신문 | 경주 구정동(九政洞) 고분군(古墳群)은 경상북도 경주시 구정동 145-8번지 일대(一帶)에 있는 해발(海拔) 약 40m의 산마루에서 3기의 분묘(墳墓)가 있었는데 1951년 동검(銅劍)과 말방울을 비롯한 철제품(鐵製品)이 발견되어 수습(收拾)하였다. 1982년 국립경주박물관(國立慶州博物館)이 발굴(發掘)하여 1991년 3월 30일 사적(史蹟)제350호로 지정(指定)했다. 사적(史蹟)은 기념물(記念物) 가운데 선사시대(先史時代)의 유적(遺蹟) 및 고분(古墳)과 정치 및 전쟁에 관한 유적(遺蹟), 제사와 신앙에 관한 유적(遺蹟), 산업이나 교통과 토목에 관한 유적(遺蹟), 교육과 사회사업 관계의 유적(遺蹟), 분묘나 비석 등의 유적(遺蹟)으로 중요한 것을 말한다.
자연 모습 그대로의 산등성이를 이용(利用)하여 산의 봉우리 같은 봉분(封墳)을 만들었으며 구덩이를 파고 나무널을 넣어서 덧널을 만든 덧널무덤, 즉 토광목곽묘(土壙木棺墓)이며 특이한 구조(構造)로 2기(基)는 합장(合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부부(夫婦)로 추정(推定)된다. 북쪽 분묘(墳墓)에서는 단갑(短甲)과 철제(鐵製) 목가리개와 쇠창, 고리자루칼(환두대도), 그리고 쇠도끼와 와질토기(瓦質土器)와 도질토기(陶質土器) 등이 출토(出土)되었고 남쪽 분묘(墳墓)에서는 단경호(短頸壺)와 연질형(軟質形)의 기대(器臺)와 대형철모(大形鐵矛) 등이 나왔다.
경주지역에서 단갑(短甲), 와질토기(瓦質土器)와 도질토기(陶質土器)가 처음으로 발굴(發掘)되었고 긴창끝 등이 나온 것으로 보아 당시(當時) 신라의 지배계급(支配階級)의 무덤일 것이라 생각된다. 5세기 이후 무덤들은 다량(多量)의 금동제품(金銅製品)이 나오고 있는 점과 신라의 통상적(通常的)인 돌무지덧널무덤에서 한 발 진보(進步)된 분묘(墳墓)인 점 등은 신라시대의 무덤이 발달(發達)되어 온 과정(過程)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단초(端初)를 제공(提供)하고 있는 것으로 사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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