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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학 박사
윤 해 수 | ⓒ 황성신문 | 법정동(法定洞)으로는 구정동(九政洞)이고 행정동(行政洞)은 불국동(佛國洞)에 속한다. 옛날에 이 동네에서 탄생(誕生)한 사람이 자라서 아홉명이나 정승(政丞)이 되었다고 하여 내동면(內東面) 구정리(九政里)라 했다고 하며 구정(九政), 탑거리(塔巨里)와 다릿거리, 방천촌(防川村)과 밭가운데, 웃마을, 장터마을, 그리고 정거장(停車場)마을 등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주요 기념물(記念物)이나 시설물(施設物)은 구정동 방형분(九政洞方形墳), 분성김씨 정려각(盆城 金氏旌閭閣), 불국사온천(佛國寺溫泉), 불국사 시장(佛國寺市場), 등이 있다.
구(舊) 불국사역(佛國寺驛)앞과 로타리(rotary)에 불국전통재래시장(佛國傳統在來市場)이 있어서 정거장(停車場) 마을과 장터마을이라고 불렀으며 불국동(佛國洞)의 중심가(中心街)로 옛부터 상권(商圈)이 발달하여 왔다.
구(舊) 불국사역(佛國寺驛)은 경주시 구정동 459-12번지와 시래동 323-2번지 위에 걸쳐 있는 동해선(東海線)의 철도역(鐵道驛)이었다. 불국사(佛國寺)와는 약3km, 석굴암(石窟庵)까지는 약5km 정도(程度)의 먼 거리에 있으므로 이곳에서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으로 가려면은 택시(taxi)나 시내버스를 타야만 하는데 60년대와 70년대에는 기차(汽車)를 이용하여 불국사역(佛國寺驛)까지 와서 도보(徒步)로 오가는 수학 여행단(修學旅行團)과 신혼부부(新婚夫婦)와 일반 관광객(觀光客)의 행렬로 장관(壯觀)을 이루기도 했었다. 2021년 12월 28일에는 동해선 복선 전철화(東海線複線電鐵化) 공사가 완성(完成)이 되어 원래의 철로(鐵路)는 폐선로(廢線路)가 되어 철수했는데 역(驛)도 역시 폐역(廢驛)이 되었으나 역사(驛舍)는 한국철도공사(韓國鐵道公社)가 철도기념물(鐵道紀念物)로 지정하여 옛 추억(追憶)과 향수(鄕愁)를 달래는 수많은 이야기도 보듬어 안은체 역사(歷史)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경주 구정동(九政洞) 고분군(古墳群)은 경상북도 경주시 구정동 145-8번지 일대(一帶)에 있는 해발(海拔) 약 40m의 산마루에서 3기의 분묘(墳墓)가 있었는데 1951년 동검(銅劍)과 말방울을 비롯한 철제품(鐵製品)이 발견되어 수습(收拾)하였다. 1982년 국립경주박물관(國立慶州博物館)이 발굴(發掘)하여 1991년 3월 30일 사적(史蹟)제350호로 지정(指定)했다. 사적(史蹟)은 기념물(記念物) 가운데 선사시대(先史時代)의 유적(遺蹟) 및 고분(古墳)과 정치 및 전쟁에 관한 유적(遺蹟), 제사와 신앙에 관한 유적(遺蹟), 산업이나 교통과 토목에 관한 유적(遺蹟), 교육과 사회사업 관계의 유적(遺蹟), 분묘나 비석 등의 유적(遺蹟)으로 중요한 것을 말한다.
자연 모습 그대로의 산등성이를 이용(利用)하여 산의 봉우리 같은 봉분(封墳)을 만들었으며 구덩이를 파고 나무널을 넣어서 덧널을 만든 덧널무덤, 즉 토광목곽묘(土壙木棺墓)이며 특이한 구조(構造)로 2기(基)는 합장(合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부부(夫婦)로 추정(推定)된다. 북쪽 분묘(墳墓)에서는 단갑(短甲)과 철제(鐵製) 목가리개와 쇠창, 고리자루칼(환두대도), 그리고 쇠도끼와 와질토기(瓦質土器)와 도질토기(陶質土器) 등이 출토(出土)되었고 남쪽 분묘(墳墓)에서는 단경호(短頸壺)와 연질형(軟質形)의 기대(器臺)와 대형철모(大形鐵矛) 등이 나왔다.
경주지역에서 단갑(短甲), 와질토기(瓦質土器)와 도질토기(陶質土器)가 처음으로 발굴(發掘)되었고 긴창끝 등이 나온 것으로 보아 당시(當時) 신라의 지배계급(支配階級)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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