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가장존 공인중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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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학 박사
윤 해 수 | ⓒ 황성신문 | -지난호에 이어
새(사이)말은 돌박과 중리(中里) 사이에 있다고 해서 샛말, 또는 간촌(間村)이라고 한다. 새말 동쪽으로는 널바티이라고 하여 넓은 등성이가 있고 서쪽으로는 두덜이라는 들판이 있다. 그리고 북쪽에는 물판 디이라고 하는 등성이가 있는데 이는 보(농사에 필요한 물을 봇도랑으로 흘러가도록 강을 가로 막아서 가두는 낮은 뚝)를 통해 농사(農事)에 필요한 물을 관리(管理)하고 물을 이용(利用)하는 사람들의 명단(名單)을 적은 분수판(分水板)이나 봇도랑을 만드는데 돈이나 근로(勤勞) 등의 공로(功勞)가 있는 사람들의 명단(名單)을 적어 세운 보의 공로(功勞)판이 있었던 등성이를 가르킨다.
남쪽에는 소정평(蘇亭坪) 또는 송정평(松亭坪)이라는 들이 있어 이곳의 사람들은 소지이들이라고 불렀으며 여기에 물을 대기위한 소지이보가 있었다고 하는데 장에 오가는 사람들이 쉬어가도록 아주 큰 소나무 정자를 지어서 현판을 소정(蘇亭)이라고 써서 걸었다고 하여서 이름했다고 한다.
아랫마을은 진현동793번지 일대(一帶)인데 마을앞의 거랑가에 석매깐터(연자방앗간)가 있고 아랫마을에서 물미쪽으로 가면 거랑 건너에 야트막한 산기슭에 미(묘)가 있어서 앞미땅갓이라고 한다.
물미마을 북동편은 들판이였다. 그 들판을 불국사상가지구(佛國寺商街地區) 앞 주차장(駐車場) 시설지구(施設地區)로 지정하여 주차장(駐車場)으로 사용(私用)하였으며 이 곳을 조사(調査)하여 한국문화재보호재단(韓國文化財保護財團)이 2002년 부터 2003년에 걸쳐 발굴조사(發掘調査)를 했는데 주거지(住居址) 3기가 발견(發見)되였다. 토함산(吐含山) 에서 흐르던 하천(河川)이 평지(平地)를 만나 유속(流速)이 느려지면서, 경사면(傾斜面)으로 변환(變換)된 지역(地域)에서 사질토(沙質土), 자갈 등이 퇴적(堆積)되어 형성된 선상지(扇狀地)의 선단부(扇端部)이다. 아무튼 발굴된 주거지(住居址)는 장방형(長方形)으로 동서향이였는데 내부(內部)에는 아무런 시설(施設)의 흔적은 없었으며 바닥은 생토(生土)로 되어 있었다. 한 주거지(住居址)에서 민무늬토기(無文土器)와 대팻날도끼(扁平偏刃石斧)가 또한 주거지(住居址)에서는 구멍무늬토기인 공열토기 (孔列土器)가 나왔다. 지금은 발굴(發掘)을 완료 (完了)하여 두산위브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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