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신라인 | ⓒ 황성신문 | |
 |  | | ↑↑ 대구 한비수필학교장
명예문학박사
수필가 이영백 | ⓒ 황성신문 | 신라 박제상(朴堤上)은 영해(寧海)박씨 시조다. 호는 관설당(觀雪堂), 신라 내물왕 때 이찬(伊湌)과 삽량주간(歃良州干), 눌지왕 때 민양주간(敏良州干)을 지냈다.
무엇보다 신라 눌지왕 2년에 고구려에 특파되어 볼모로 가 있던 내물 왕자 “복호(卜好)”를 데려왔다. 다시 왜국에 가 볼모로 가 있던 “미사흔(未斯欣)”을 탈주ㆍ귀국 하는데 성공하였으나 그는 왜왕의 악형을 받아 “박다진 목도(博多津木島)”에서 화형을 당하였다.
영해박씨 족보에는 박제상으로부터 유명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는 범 박씨(凡朴氏)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9세손이며, 파사왕의 5세손으로 20세 때 태수 벼슬에 올랐다. 눌지왕 시절 신라는 고구려와 일본의 압박에 시달리는 약소국가였기 때문에 눌지왕의 두 아우인 복호와 미사흔이 각각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었다. 이 두 왕자를 구출한 박제상의 무용담은 이천여 년이 지난 오늘 날까지 신화처럼 전해 내려온다.
서기 417년 그는 눌지왕의 명을 받고 단신으로 적국인 고구려에 입국하였다. 같은 민족으로서 왕자를 볼모로 잡아 두는 것은 후세에 부끄러운 일이라며 장수왕을 설득, 왕자 복호를 구출하였다.
이어서 정치적인 망명객을 가장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기계(奇計)를 써서 미사흔을 탈출시키고, 자신은 포로가 된다. 왜왕은 그에게 “일본국의 신하가 되면 벼슬을 내려주고 편안히 살도록 해주겠다.”고 회유한다. 그러나 박제상은 “왜의 신하가 되느니 차라리 계림의 개ㆍ돼지가 되는 편을 택하겠다.”며 최후까지 충정을 지키다 화형(火刑)을 당하였다.
부인은 정열(貞烈)을 지켰다. 남편이 일본으로 건너간 후 두 딸과 함께 동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치술령(鵄述嶺,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에 올라 돌아올 줄 모르는 남편을 기다리다 자진하여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
그녀의 넋은 “치술조(鵄述鳥)”라는 새가 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남편 넋을 고국으로 모시고 왔다는 전설이 있다. 눌지왕은 부인의 넋을 은을암(隱乙庵, 범서면 척과리 오룡산 국수봉 기슭)을 세워 달래었다.
영해박씨 족보에서 귀한 자료를 얻어내어 문외한이지만 감히 이곳에 옮겨 본 것이다. 세인들이여, 많은 질책을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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