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혁거세의 금자(金尺)있을까...‘금척설화’ 비밀 푼다
금척리 고분군 발굴 조사 본격 착수
약 50여기 고분 발굴···5~6세기 조성 추정
1952년에 3기(30호분~32호분)고분 발굴
신용소 기자 / 입력 : 2024년 05월 24일(금) 15:57
|
|  | | ⓒ 황성신문 | | 박혁거세 금자(金尺)의 비밀이 풀릴까. 금척리 고분군 대규모 발굴 작업이 시작됐다. 경주시는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와 함께 지난 21일 오전 건천읍 금척리 251번지 일원에서 고유제를 올리고 ‘금척리 고분군 발굴조사’에 나섰다. 고유제는 국가나 사회에서 중대한 일을 치르기 전에 그 사유를 알리는 의례다. 금척리 고분군은 약 50여기의 고분이 모여 있는 곳으로, 경주를 대표하는 고분군인 대릉원과 비교될 만큼 중요한 유적이지만 본격적인 연구는 이번이 처음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인 5세기에서 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금으로 만든 자(金尺·금척)가 매장돼 있다는 ‘금척설화’와 신라의 행정조직체인 모량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도 알려져 신라 초기의 역사를 밝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경주시와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가 중장기 계획을 수립하고 처음으로 시행하는 이번 조사는 전체 13만3천400m²의 면적을 7개 지구로 나눠 진행되며, 땅속 보이지 않는 고분까지 면밀하게 조사될 예정이다. 시는 이번 발굴을 통해 고분의 정확한 묘역 경계와 폐고분의 존재 여부 등을 확인하고, 이를 토대로 향후 복원과 정비 계획을 세울 계획이다. 금척 고분의 봉토분들 가운데 지난 1952년에 3기(30호분~32호분)의 고분이 발굴된바 있고, 1981년에는 국립경주박믈관에 의해 상수도 부설 공사 중 확인된 고분군 보호구역의 남쪽 한계선 외측의 8기가 조사됐다. 설화에 의하면 이 고분들 가운데 하나에 박혁거세의 금자가 묻혀 있어 금척이라고 명명됐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고 신라시대 초기부터 이곳에 고분군이 조영되기 시작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조사된 고분들은 돌무지덧널무덤이 주류를 이루며 그밖에 덧널무덤, 독널무덤, 돌덧널무덤 등도 혼재했다. 출토된 유물로는 금제귀고리, 곡옥장식목걸이, 은제허리띠 등이 있는데 이러한 조합상은 신라 지방 고총들에서 출토되는 양상과 유사하다. 또 고분군 남쪽에는 모량이라는 옛 지명이 있어 금척리 고분군을 신라의 6부 가운데 하나인 모량부 귀족들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모량부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24대 진흥왕의 왕비인 지소부인 또는 식도부인 박씨의 출신지로 돼 있는 점을 보아 신라의 중앙정계에서 큰 역할을 하던 집단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고분의 크기, 묘제, 입지 등이 합치된다는 것이다. 규모에 있어서는 경주 평지의 최대형 분들보다 작으나 대형인점, 고분들이 위치한 곳이 평지이고 발굴 조사된 고분들의 경우 경주 중심부의 평지에 조성된 것과 같은 돌무지덧널무덤인 점, 그리고 출토유물의 양식에 있어서도 별 차등성이 인정되지 않는 점 등이 그것이다. 또 인근의 사라리 유적에서 기원후 1세기 무렵의 대형 덧널무덤이 조사됐고, 여기서 많은 철기와 청동 제품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신라 성장에 일익을 담당했던 집단의 소재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날 고유제는 경주시, 국가유산청, 학계, 지역 주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경주향교의 집례로 거행됐다. 주낙영 시장은 “이번 행사는 국가유산청에서 실시하는 미래지향적 국가유산 관리체계를 위한 첫 사례로 ‘국가유산 거주지역 정주 환경 개선’ 및 ‘역사문화 자원을 활용한 지역 활성화’의 모범사례가 되길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고분군 일대 12만9천643㎡가 지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43호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다.
|
|
신용소 기자 - Copyrights ⓒ황성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
|
|
|
실시간
많이본
뉴스
|
|
|
|
|
최신뉴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