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가장존 공인중개사
사무소 대표
행정학 박사
윤 해 수 | ⓒ 황성신문 | 신라시대(新羅時代) 임금이 동해(東海)로 오가던 길목에 있는 마을이었는데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아마 신라(新羅)가 개국(開國)하기 이전부터 사람들이 많이 왕래(往來)하면서 자연적으로 마을이 생겨났을 것이라 여겨진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중엽까지는 덕동(德洞)과 암곡(暗谷)이 한 마을이었는데 그 후에 마을이 커지면서 분리(分離)되었다. 조선 후기(朝鮮後期) 경주군 내동면(內東面)에 속한 지역(地域)으로 덕골 또는 덕동리(德洞里)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 폐합에 따라 천군리(千軍里) 일부를 통합(統合)하여 다시 덕동리(德洞里)가 되었으며 1955년 9월 1일 시제(市制) 개편에 따라 내동면 전지역(全地域)이 시로 편입(編入)됨에 따라 경주시 덕동(德洞)이 되었다. 덕동(德洞)은 법정동이고 행정동인 보덕동(普德洞) 관할하에 있다. 댐(dam)을 만들어 마을이 수몰(水沒)되기 이전에는 황룡골에서 명실골과 기와골에서의 흐르는 물줄기가 모이는 덕동(德洞)마을을 위시하여 가가호호(家家戶戶) 모여 부락(部落)을 이루고 있었다. 1977년 5월 31일 마을 들머리와 신평동(新坪洞)과의 경계지점(境界地點)에 남북으로 뚝을 쌓아 댐(dam)을 만들면서 대부분(大部分)의 마을이 수몰(水沒)되었고 그곳에 살던 수몰민(水沒民)들은 흩어지게 되었는데 경주 시내 등 다른 곳으로 이주(移住)해 가고 몇 가구가 덕동호수(德洞湖水) 동쪽으로 호수(湖水)를 껴안고 도는 둘레길을 따라 산 중턱에 약 20여 가구(家口)가 자리하고 있다.
고든골과 소바탕골, 그리고 광산골, 도른자락골, 딱밭골, 바람내기골, 화장골 등의 골짜기가 있고 나부재와 늘재 등의 고개를 비롯하여 베락바우와 산(山)으로는 말대가리산, 자연마을로는 유리방(琉璃坊)과 안율방, 그리고 명실(明室) 등이 있다.
경주시 덕동 580-2번지에 덕동경로당(德洞敬老堂)이 있는데 이곳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마음이 착하고 인심(人心)이 좋아 덕(德)을 이룰 수 있는 고장이라는 뜻에서 덕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덕동(德洞)은 순우리말로 덕골인데 덕골을 한자(漢字)의 소리와 뜻을 따라서 표기(表記)한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